잡지에서 읽은 시

사람 도서관/ 권영옥

검지 정숙자 2023. 9. 7. 02:20

 

    사람 도서관

 

     권영옥

 

 

  한 줄 문장으로 생을 압축할 수 있는 돈벌레가

  법전 속에 끼여 목을 떨어뜨리고 있다

  부도의 내리막길을 막아야 하는 그는

  빈 구멍만 보아도 놀라고,

  수렁만 봐도 허우적거린다

  진흙뻘에는 앞선 발자국이 흩어져 있고

  부러진 각목 사이로 파묻은

  신체포기각서가 피부처럼 붙어서 너덜거린다

  호루라기 소리, 수갑의 금속성

  이 문장에 이르면

  나는 의자에 등을 묻고 저탄 같은 생을 생각한다

  세상 모든 문어발은

  나를 통과하면 든든한 다리로 변할 수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의 날들

  가난이 창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뒷문으로 날아간다고 했던가

  호적에 붉은 빗금이 쳐지고

  혼자서 시멘트 바닥에 누워야 하는 여자는

  몇 밤이나 한뎃잠을 잘 수 있을까

  판례를 덮은 후 창밖을 본다

  도서관의 돈벌레들이

  죄다 노란빛의 모과 쪽으로 기어가는 것을 본다

     -전문(p.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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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 사람』 2023-가을(11) <poem & poetry/ 기발표작> 에서 

  * 권영옥/ 경북 안동 출생, 2003년『시경』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청빛 환상』『모르는 영역』외, 비평서『구상 시의 타자윤리 탐구』『비시간성에 의한 그림자 시학』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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