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도서관
권영옥
한 줄 문장으로 생을 압축할 수 있는 돈벌레가
법전 속에 끼여 목을 떨어뜨리고 있다
부도의 내리막길을 막아야 하는 그는
빈 구멍만 보아도 놀라고,
수렁만 봐도 허우적거린다
진흙뻘에는 앞선 발자국이 흩어져 있고
부러진 각목 사이로 파묻은
신체포기각서가 피부처럼 붙어서 너덜거린다
호루라기 소리, 수갑의 금속성
이 문장에 이르면
나는 의자에 등을 묻고 저탄 같은 생을 생각한다
세상 모든 문어발은
나를 통과하면 든든한 다리로 변할 수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의 날들
가난이 창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뒷문으로 날아간다고 했던가
호적에 붉은 빗금이 쳐지고
혼자서 시멘트 바닥에 누워야 하는 여자는
몇 밤이나 한뎃잠을 잘 수 있을까
판례를 덮은 후 창밖을 본다
도서관의 돈벌레들이
죄다 노란빛의 모과 쪽으로 기어가는 것을 본다
-전문(p. 187-188)
-------------------------
* 『문학과 사람』 2023-가을(11)호 <poem & poetry/ 기발표작> 에서
* 권영옥/ 경북 안동 출생, 2003년『시경』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청빛 환상』『모르는 영역』외, 비평서『구상 시의 타자윤리 탐구』『비시간성에 의한 그림자 시학』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한구역/ 천융희 (0) | 2023.09.08 |
---|---|
절영마(絶影馬)/ 장한라 (0) | 2023.09.07 |
아포칼립스/ 박남희 (2) | 2023.09.06 |
간재미 보살(菩薩)/ 김준기 (0) | 2023.09.05 |
침묵의 힘/ 복효근 (0) | 2023.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