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흑백사진 외 1편/ 조현석

검지 정숙자 2023. 9. 6. 01:48

 

    흑백사진 외 1편

 

    조현석

 

 

  어느 봄날 낡은 러인셔츠 바람으로

  가게 앞 깡통 의자에 앉아

  심각하게 신문 읽는 당신

 

  어느 여름 계곡 할아버지와 일찍 죽은 고모

  두 사람 사이 바위에 앉아 흐르는 물에

  적은 발로 물장구치는 당신

 

  어느 늦가을 날지 못하는 장난감 비행기에

  어린 나를 태우더니

  모래바람 세찬 중동 사막으로 날아간 당신

 

  어느 겨울 밤새워 운 듯 눈이 부은 엄마

  귀여운 배불뚝이 나를 가운데 앉히고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앞만 보는 당신

      -전문(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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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고도 외전外典 

 

 

  그렇구나, 걸을수록 멀어지고     

  오를수록 오늘의 끝으로 다가가는

  깎아지른 빌딩의 그림자 꼿꼿한 도시

  자신을 되비치는 유리창 벽들 빛나고

  또 빛나는 길이 시작하고 끝나는

  인도 앞과 뒤와 옆, 또 그 앞과 뒤와 옆

  그 어디고 천 길 낭떠러지로  이어지니

  무작정 잎만 보고 걸어가야 한다

  뒤를 돌아보는 후회 따위는 남기지 말고

 

  아하, 추락은 가능해도

  상승이나 횡단과 추월은 허용되지 않는

  어떤 것도 그림자 남기지 못하는

  금빛 햇살이 소리 없이 녹아내리는

  바람마저 툭툭 끊겨 가쁜 숨소리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도시 한복판

 

  백척간두, 아찔한 빌딩 꼭대기

  발가락 닳고 짓물러 뭉개지기 전에

  도착한 어느 곳

  그저 삼보일배 고행을 강요하는데

  걸음은 결코 더디어지지 않는다

  벼랑이다 걸을수록 기어갈수록

  멀어진 세상과 가까워지는

  허공에 발 딛듯 안전하게 걸어야 한다

        -전문(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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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차마고도 외전』에서/ 2023. 8. 26. <북인> 펴냄  

  * 조현석/ 1963년 서울 출생, 1988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에드바르드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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