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기다림
노춘기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너의 말은 모조리 조각처 반짝인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흔들린다
창밖으로 햇살을 밀어내는 너의
눈빛이 나른하다 여러 겹의 커튼이
너와 나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는 지금 흐릿하다, 이 적막한 순간의
틈으로 낯선 인기척이 느껴진다
휘발하는 풍경 속에서 너를 지워 가는
차가운 잔상들,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그 많던 너의 표정들을 본다 한꺼번에
네 얼굴로 흩뿌려지던 소리들을 기억해 본다
투명한 입술 위에서 출렁이는 회전목마를 생각한다
너는 움직인다 몸을 일으킨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너,
흐린 사물 같은 너와 함께 사라질 수 있을까
모든 너에게서 잊혀질 수 있을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너,
누구에게도 들킨 적 없는 너
필라멘트 전구처럼 달아오른
두 눈을 들어 올리는 너
-전문(p.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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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3-봄(28)호 <poem> 에서
* 노춘기/ 2003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오늘부터의 숲』『너는 레몬나무처럼』『너는 아직 있다』, 저서『근대시의 주체와 감정의 인식』『자유시의 이념과 근대적 서정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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