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지나친 기다림/ 노춘기

검지 정숙자 2023. 7. 23. 01:35

 

    지나친 기다림

 

     노춘기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너의 말은 모조리 조각처 반짝인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흔들린다

 

  창밖으로 햇살을 밀어내는 너의

  눈빛이 나른하다 여러 겹의 커튼이

  너와 나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는 지금 흐릿하다, 이 적막한 순간의

  틈으로 낯선 인기척이 느껴진다

 

  휘발하는 풍경 속에서 너를 지워 가는

  차가운 잔상들,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그 많던 너의 표정들을 본다 한꺼번에

 

  네 얼굴로 흩뿌려지던 소리들을 기억해 본다

  투명한 입술 위에서 출렁이는 회전목마를 생각한다

  너는 움직인다 몸을 일으킨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너,

 

  흐린 사물 같은 너와 함께 사라질 수 있을까

  모든 너에게서 잊혀질 수 있을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너,

  누구에게도 들킨 적 없는 너

 

  필라멘트 전구처럼 달아오른

  두 눈을 들어 올리는 너

     -전문(p.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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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파란』 2023-봄(28)호 <poem> 에서  

  * 노춘기/ 2003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오늘부터의 숲』『너는 레몬나무처럼』『너는 아직 있다』, 저서『근대시의 주체와 감정의 인식』『자유시의 이념과 근대적 서정의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