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병철_박스에 든 사람들(발췌)/ 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검지 정숙자 2023. 7. 22. 03:08

 

    크레바스에서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 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 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 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박정은, 「크레바스에서」/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전문 

 

 

  박스에 든 사람들/ 4. 크레바스에서 탈출하기(발췌)_이병철/ 시인 · 문학평론가

  박정은의 시는 현실원칙에 의해 '크레바스'로 상징되는 고독 속에 유폐된 한 젊은 영혼의 존재론적 고백이다. 화자는 크레바스로의 추락을 "찾을 수 없는 실종 상태"라고 말한다. 이는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유사 죽음의 상태나 마찬가지다. 이를 현실에 대한 패배적 수용으로 읽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박정은은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생환 일지를 쓰기로 한다"며 '크레바스'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현실원칙에 의해 유폐된 자기 존재를 고독 바깥으로 밀고 나가려는 것이다.

  '크레바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 현실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구렁이지만 단 한 가지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 다. 더 깊은 추락으로 스스로를 끌어내리는 것만큼은 가능한 곳이 바로 '크레바스'다. 이 자발적 침잠과 유폐에는 반복된 좌절과 실패로부터 학습된 무기력이 작용하고 있다. 아무리 몸부림쳐 봤자 '크레바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그저 적응하며 사는 쪽이 덜 고생스럽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저계급론'이 심화된 불평등, 부조리의 사회에서는 든든한 배경 없이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기득권의 장벽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취업, 연애, 결혼, 내 집 장만을 포기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 패배를 수용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없이 '크레바스'에 머무른다. 타자와의 그 어떤 교류도 원치 않은 채 '크레바스'에 갇혀 고독 속에 침잠하는 것이다. 반지하 원룸, 옥탑, 고시원 등의 삶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화자는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육체는 고독 속에 있어도 정신은 '크레바스' 바깥의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다. "얼음 속에 갇힌" "햇빛을 먹으"면 "고독도 요기가 된다". 그 힘으로 현실의 절망을 "깨부수기 위"한 "생환 일지를 쓰기로 한다". 그 생환 일지가 '시'라는 것은 자명하다. (p. 시 28-29론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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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파란』 2023-봄(28)호 <issue     원룸> 에서  

  * 이병철/ 2014년 『시인수첩』을 통해 시 부문 & 『작가세계』를 통해 평론 부문 등단, 시집『오늘의 냄새』『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원룸 속의 시인들』『빛보다 빛나는 어둠을 밀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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