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외 1편
김정수
통째 물감통인 저 나무
파랑과 노랑을 황금비율로 섞어
봄을 만들고 쉽게 묽어지지 않는
하늘을 덧칠해 바람을 흔들고
색과 상이 섞여 뭉치지 않도록
소낙비 쏟아져도 흘러넘치지 않도록
두 손으로 고이 균형을 맞추고
가지의 미간에 열매를 부풀리고
초저녁 달빛에 다가온 두 그림자에
저녁놀 스민 빨강을 쏟아버리고
새벽 미명에 파랑을 다 풀어버리고
마당 건너 나란히 노랗게 물들어
가을을 낳았을 예정이다 가으내
뒷산 헤집어 빨강과 노랑과
파랑을 채집했으리라
첫눈 내리던 새 울음소리로
알록달록 물감 밴 손으로 깨끗이 씻고
-전문(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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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
시내에 나간 아내가
무료로 나눠준다며
무궁화 묘목 열 그루를 들고 왔다
벗겨지지 않도록
새끼줄로 얼기설기 동여맨
흙신발을 신고 있었다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는데
어린 데도
용케
울지 않고 잘 따라왔다
혼자라면 오다가 버려졌거나
누군가에게 건네졌거나
말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삽을 챙겨
아이들과 뒷산에 올라
외롭지 않은 간격으로 심고는
발로 꾹꾹 눌러주었다
간밤에 비 내리는 소리 들려왔다
-전문(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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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사과의 잠』에서/ 2023. 6. 30. <청색종이> 펴냄
* 김정수/ 199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홀연, 선잠』『하늘로 가는 혀』『서랍 속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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