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쓰카와 손재형 외 1편
강나루
제 아무리 추사를 흠모한다 해도
왜인에게 세한도를 넘길 수 없는 법
1943년,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를
벌써 며칠째 찾아가고 있었다
조선사람 손재형, 그는 스토커였다
그림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일본으로 건너간 후지쓰카를 쫓아가
그에게 졸라댔지만
얼음처럼 차갑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1944년 여름,
미군의 공습이 도쿄를 무차별 공습할 때
싸이렌 소리를 들으며
노환으로 다다미에 누워있는 후지쓰카 앞에 엎드렸다
제주도 대정의 담장에 갇혀
분통터지는 귀양살이를 삭힌 지 오래,
추울 때일수록 푸르른 송백을 그린 추사를 생각하며
무릎을 꿇었다
중국의 선비들도 감탄하고 흠모해
모두 그림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듯이
세한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법,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해 대책없는 일이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무릎을 꿇는 일이
분한 마음 삭힌 추사만 하겠는가
들판에서 눈을 맞는 가지 부러진 송백만 하겠는가 싶어
백팔 배 하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참 좋은 왜인 후지쓰카는
세한도의 주인을 알아보고
세한의 송백 같은 손재형에게 그림을 넘겼다
공습으로 후지쓰카의 연구실이 불타버리기 직전이었다
-전문(p.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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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가 눈을 뜰 때
베란다에 둔 감자 종자에서 눈이 트였다
마대 속은 어두운데
하늘을 보려고 옆구리에서 항문에서, 온몸에서
빛이 틔어 마대 속 하늘이 환해졌다
본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일
마대 속에서 답답해 하면서 하늘을 열고 빛을 쏟아낸다
눈은 한결같이 하늘을 향하고
한철동안 빛을 보지 못한 씨감자는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온몸이 파랗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독기를 품는 일,
푸른 독기를 품는 일은 빛을 보는 일
어둠 속에서 겨우 숨 쉬는 것들은
멍이 들도록 빛의 출구를 찾을 것
나는 마대 속 같은 방 안에서
온몸에 멍이 들도록 몸부림쳤다
마침내 푸른 하늘을 닮아
멍이 든 영혼이 눈을 뜬다
눈에 멍이 든 사람을 보면 반갑다
하늘에 부딪혀 하늘을 닮아서
멍을 뚫고 하늘이 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푸르고 멍든 사람은 빛이 되어
졸래졸래 줄기를 뻗으며 빛을 향해 포복한다
세상의 모든 멍든 눈들이 아프게 길을 간다.
-전문(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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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감자가 눈을 뜰 때』에서/ 2022. 8. 30. <시와사람> 펴냄
* 강나루/ 1989년 서울 출생, 2020년『아동문학세상』으로 동시 부문 & 2020년『에세이스트』로 수필 부문 & 2020년 『시와사람』으로 시 부문 등단, 에세이집『낮은 대문이 내게 건네는 말』, 동시집『백화점에 여우가 나타났어요』, 연구서『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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