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작품론/ 시집 속의 시 읽기 - 김명서

검지 정숙자 2010. 10. 31. 00:22

 

      시집 속의 시 읽기

       -정숙자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

 

        김명서(시인)


  

       무료한 날의 몽상

       -無爲集 2


        정숙자



     막대기가 셋이면 <시>자를 쓴다

     내 뼈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자 쓸 수 있을까

     땀과 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물굽이로 햇빛으로 돌아간 다음 남은 뼈 오롯이 추려

     시  시  시…… ..…

     이렇게 놓아다오

     동그란 해골 하나는 맨 끝에 마침표 놓고 다시 흙으로 덮어다오

     봉분封墳일랑 돋우지 말고 평평하게 밟아다오

                   내 피를 먹은 풀뿌리들이 짙푸른 빛으로 일어서도록 벌레들 날개가 실해지도록…

                 가지런히 썩은 <시>자를 이슬이 먹고 새들이 먹고 구름이 먹고 바람이 먹고…

    자꾸자꾸 먹고 먹어서 천지에 노래가 가득하도록…                         

    독을 숨기고 웃었던 시는 내 삶을 송두리째 삼키었지만 나는 막대기 둘만 있으면 한 개 부러뜨려 <시>자를 쓴다

    젓가락 둘 숟가락 하나 밥상머리에서도 <시>자를 쓴다

    못 찾은 한 구절 하늘에 있어 오늘도 쪽달 허공을 돈다


    시인에게 시는 차라리 신앙의 숭고한 대상이다. 살아서 숨이 붙어 있는 한 시를 쓰고, 시를 쓰다가 죽고자 하는, 죽어서도 시를 쓰겠다는 치열한 시정신을 만난다. 우선 그 깊은 신앙심에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시를 쓰고자 하는지 그 이유가 없다. 평생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던 보르헤스가 밝혀낸 것은 그 어떤  이야기도 새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쓰는 이야기란 결국 그 언젠가 누군가가 썼던 이야기가 약간 변형된 것일 뿐. 포스트모던은 새 것이 새 것이 아니라는 것이 폭로됨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시를 쓰는데 목숨을 걸었다.


     조선의 황진이가 다시 나왔다. 그녀의 유언은 이러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 모래터에 그냥 내처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먹게 함으로써 천하 여인들의 경계로 삼아라.”


    그런데 정숙자의 시구詩句 또한 그러하다.

    “봉분일랑 돋우지 말고 평평하게 밟아 다오/ 내 피를 먹은 풀뿌리들이 짙푸른 빛으로 일어서도록 벌레들 날개가 실해지도록…/ 가지런히 썩은 <시>字를 이슬이 먹고 새들이 먹고 구름이 먹고…”


   황진이는 자기의 봉분으로 천하 여인의 경계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자기의 뼈로 쓴 <시>자(字)를 이슬도 새들도 구름도 먹으라 한다. 그러면 천지에 노래가 가득하단다. 겸손할 줄 알아야 하고, 사실을 사실로 불 줄 아는 눈을 가져야 비로소 시인이다. 시 구절을 아무리 외운들 한 끼의 식사도,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닦아주지 못한다.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지만 결국은 시와의 열애에 빠진 한 시인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하고 만다. 시의 열병에 입술을 깨물고 가슴 움켜 주는, 시를 사랑했기에 괴로웠고, 행복했을 뼈를 깎아내는 듯한 괴로움을 인내하며 시와 더불어 나이 먹어 가는 자기 성찰적인 고백에 장미꽃 한 다발을 보내고 싶다. 부디 “못 찾은 한 구절”이 보름달로 떠오르길….   

 

 

   * 김명서/ 전남 담양 출생, 2002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6.11~12월호/ <시집 속의 시 읽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