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바람의 터 외 1편/ 조성례

검지 정숙자 2023. 6. 2. 02:05

 

    바람의 터 외 1편

 

    조성례

 

 

  장독가에 물봉선이 한창인데

  빠져나간 자리마다 바람이 터를 잡았다

 

  어긋나 있는 문틈이 맨 처음 눈에 뜨인

  그들의 통로다

  때론 함부로 들어와서 몸을 뉘었다 가기도 하고

  들어줄 이 하나 없는 마루 끝에

  계절의 안부를 놓고 가기도 한다 어쩌다

  먼지나 낙엽들이 제 자리를 바꾸어 보는 것도

  사실은 바람의 덕분이다

 

  한때는 아이들이 뒹굴었을 자리에

  적막이 쌓여 있다

  망초 꽃대 우거진 자리 곁으로

  염소를 매 두었던 말뚝의 자리

  둥글게 패어 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폐가의 영역에선

  움직이는 것과

  멈추어 선 것들의 경계가 확연하다

 

  오늘도

  바람이, 바람만 다녀간다

      -전문(p.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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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치발을 세우는 것들에 말한다

 

 

  옥수수 곁순을 딴다

  대롱대롱 매달리는 손을

  힘주어 떼어 놓으며 눈물이 뚝하고 떨어진다

  출처가 불분명한 눈물이 손등을 적실 때면 또다시

  곁순을 찾아가는 손길들 사이로

  그들의 통증이 내뱉는 소리들이 머리 위를 와스스 지나간다

  어린 날 엄마의 손길처럼

  살아남은 순들을 어루만져준다

  너희들을 떼어놓지 못하면

  누대를 이을 실한 후손을 만들지 못한다고

  다산을 꿈꾸는 어미에게도

  차근차근 일러 준다

  네 것보다는 내 것이 더 실해야 하는

  세상의 원리를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잔인하다니

       -전문(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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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까치발을 세우는 것들에 말한다』에서/ 2023. 5. 30. <시산맥사> 펴냄  

   * 조성례/ 2015년 계간 『애지』로 등단시집『가을을 수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