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외 1편
강우식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참 용하게 사는 결혼은 마음의 짐이다. 처음에는 사랑만 있으면 태산도 능히 질 수 있는 그까짓것이었다. 그녀는 나만 기다려온 천사였다. 그녀의 빈터에 앉아 밤낮으로 시소게임을 했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 그럭저럭 학점도 이수하며 과락科落은 면할 줄 알았다. 일심동체가 아닌 것도 일심동체처럼 서로가 연극을 하며 잘도 견뎠다. 그러다 어느 날 나보다는 그녀가 먼저 인생은 감당 못할 짐이라 여겨 좌절했다. 세상을 버렸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꽃처럼 지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끝이었다. 살아온 그녀와의 정을 뗄 수 없는 나머지 내 삶은 해머를 맞은 듯 그저 멍했다. 마치 한 나라의 왕도 임금 노릇을 하다 승하하면 그 밑의 시종이나 신하들까지도 순장殉葬하는 심정과 같았다. 정말 나도 아내를 따라 순장되고 싶었다(여왕도 죽으면 순장제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벼락이나 맞게 해달라고처음으로 간절히 빌어 봤다. 소용없었다. 날개가 꺾여 지옥으로 가는 천사에게는 어떤 처방전도 필요 없었다. (전문,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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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플류도프의 외투
60년대 들어서였다. 맨땅에 머리를 박는 빈털터리 신세로 귀신에 홀린 듯 싹수가 노란 시에 미쳐 시인이 되겠다고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스승으로 이 땅의 제일 으뜸인 미당 서정주의 문하생이었다. 시인이 되려는 집념은 자나깨나 장대같이 우뚝하여서 행색이 남루하여도 어디서나 떳떳한 스무 살 청년이었다. 떠돌이로 겨울방학이 되어 귀향하게 되어 스승댁에 하향인사를 드리러 갔다. 내 텅텅 빈 창자 속 같은 마포 공덕동 긴긴 골목. 골목으로 몰아오는 바람은 왜 그리 살 에이는지. 미당은 높은 대청 마루에 서 있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작별인사를 올렸다. 스승은 달랑 러닝셔츠 하나에 염색한 낡은 군용작업복 차림의 내 행색이 추워 보였는지 집안에서 겨울 외투를 가지고 나와 입고 고향에 가라고 했다. 그렇다. 네플류도프의 외투보다 더 유명했던 그 군용작업복. 나는 단벌의 이 옷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업을 마칠 때까지 사철 4년 동안 입고 다녔었다. 어깨 죽지로부터 검정물이 하얗게 바래서 같은 학과 동기들이 기념으로 자필사인을 해주었던 추억이 깃든 옷이다. 다시 말머리를 이어가자. 생각지도 않은 스승의 배려에 극구 손사래를 쳤다. 본인에게는 외투가 두 벌 있으니까 그냥 입으라고 했다. 눈벌판 속의 시베리아 같은 나에게 이 외투야말로 네플류도프의 외투였다. 아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단서端緖였어라. 그 무렵 또 미당은 5.16 군사혁명으로 세상이 뒤집어져서 한동안 집에 칩거하며 공부한다고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러시아어 원서를 나에게 읽어 보기도 했다. 나는 이 외투를 입고 한 해 겨울을 어머니의 외가 결혼식도 가고 어지간히 싸다녔다. 개학이 되어서는 스승이 준 네플류도프 외투라며 여학생들에게 자랑깨나 늘어놓았다. 그러다 봄이 되자 벗어서 스승에게 세탁도 안 하고 반납하였다. 왜 네플류도프 외투인가 하면 한때 카츄샤를 사랑하다 버렸지만 다시 만나면서부터는 끝까지 책임감을 갖고 사랑했던 사연을 지닌 옷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지키는 마음을 가진 남자만이 걸치는 옷이며 그게 바로 나라며 한때 진짜 네플류도프처럼 착각하며 다니기도 했다. 이제는 그 추억도 다 지나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에 대한 열정은 다시 한 번 그때 20대처럼 있어봤으면 원이 없겠다. (전문, 4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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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소이부답笑而不答』에서, 2023. 5. 4. <리토피아> 펴냄
* 강우식/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행시초』(1974), 『사행시초 2』(2015), 『마추픽추』(2014), 『바이칼』(2019), 『백야』(2020), 『시학교수』(2021), 『죽마고우』(2022)등, 성균관대학교 시학교수로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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