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는다는 것 외 1편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힌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려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른을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전문(p. 16-17)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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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입구
별을 향해 걷다 보면 걸어서는 끝내 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발맘발맘 걸어서 다다른 종점 근처에 아직도 저만큼 떠 있는 별
보폭이 같은 사람들과 웃고 울다가 누가 걸음을 멈추면 그이를 땅에 심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별의 입구
일생 딱 한 번 축복처럼 열리는 작은 문
함께 걷던 이들이 눈망울에 비친 기억들을 문 앞에 떨궈 놓고 이내 총총 흩어진다
그런 밤은 먼 하늘에서 배를 한 척 보내와 무덤과 별들 사이에 환하게 정박해 있다가
그믐이 되면 그 달 무덤까지 내려와 멈춘 걸음들을 서쪽 하늘로 데려간다
그리운 눈을 하고 가만히 보면 은하수까지 가득 찍힌 발자국들
-전문(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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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에서, 2023. 4. 13. <걷는사람> 펴냄
* 권상진/ 경북 경주 출생, 2013년 <전태일문학상> 수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눈물 이후』, 합동시집『시골시인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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