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미나_자연의 심미성과 서정적···(발췌)/ 슬픔의 질량은 우리 몸의···/ 최춘희

검지 정숙자 2023. 3. 14. 02:06

 

    슬픔의 질량은 우리 몸의 고유한 기록이다

 

    최춘희

 

 

  물가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등만 보이고 앉은 사람

  그 뒤에 서서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던 사람도 있다

 

  아이들 깔깔, 달려가고 썬캡을 푹 눌러 쓴 사람들 팔다리 내저으며 걸어가는 천변공원, 기역 자로 허리 꺾어진 노인 뒤를 반려견이 꼬리 치며 따라가고 있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흰조팝나무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를 짓고, 이제 곧 새끼들이 날개 퍼덕이며 날아오를 것이다

 

  눈물 많은 이 세상에 온 푸르른 것들이 나는 좋다 길가 깨어진 블록 사이, 피워 낸 잔별들이 너무좋다 물안개처럼 차오르는 잘 익은 슬픔의 향취가 굶주린 배 속을 채우고 어느 날 나를 떠나갈 때 내 갈증과 비천함과 측은한 눈빛도 날이 금세 오리라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자신의 뒷모습을 아낌없이 내어 준

  당신은  누구였을까

     -전문-

 

  자연의 審美性과 서정적 순간들(발췌) _이미나/ 문학평론가 · 강릉원주대 교수

  자연은 인간의 모든 삶이 이루어지는 시원始原이자 근원적인 창조의 공간이다.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며 생명의 역동성과 실존적 의미를 통찰할 수 있다. 「슬픔의 질량은 우리 몸의 고유한 기록이다」는 자연에서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감응을 시적 이미지로 현시顯示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관조하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의 가치는 소소하고 새들한 풍경으로 표현되며, 그 표현의 진의眞意는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자신의 뒷모습을 아낌없이 내어 준" 존재 제유된다. 시적 화자는 '아이들이 깔깔대고 썬캡을 쓰고 운동하는 사람과 노인을 뒤따르는 반려견이 있는 천변공원'이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자연의 심미적 의미를 발견한다. 일상공간에서 구체화되는 "붉은머리오목눈이"와 "흰조팝나무", '블럭 사이 풀 포기의 잔별들'과 같은 "이 세상에 온 푸르른 것들"인 자연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슬픔의 향취"를 불러일으킨다. 스스로의 "비천함과 측은함"에서 발로한 '슬픔'의 감정은 치유 불가능한 "몸의 고유한 기록"으로 새겨지고, 시는 그러한 슬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탈의 기록으로 새겨지고, 시는 그러한 슬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탈의 기록으로 직조된다. 이러한 슬픔이 정조는 "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등만 보이고 앉은 사람"과 그 사람을 "오래도록···바라보던 사람"의 이미지에 접목되어 서정적 풍경으로 전경화된다. 최춘희 시인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된 슬픈 감정의 미학적 구조는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시적 의미항들의 결집으로 한 폭의 서정적 풍경을 이루고 있다. (p. 시 105-106/ 론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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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 2023-봄(52)호 <시인해부/ 근작시/ 평론> 에서

  * 이미나/ 서울대 국어교육연구소 연구교수, 홍익대, 추계예대, 수원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