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카프카
권현형
폭설을 뚫고 끝없이 걷기 위해
날마다 스탠드 전원을 켜고 잠들었다
그러나 되돌이표를 자주 사용하는
습관 때문에 도착하지 못했다
꼭 한 번 동그라미 안쪽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존경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질투한다거나 그런 감정이라기보다
눈과 귀를 오래 붙드는 풍경이나
동화책 속 달콤한 활자에 가까운 것들이 동그라미 안에 있기 때문
이다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그리워지는 기억 덕분에
소리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울었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사이렌의 부름 같은 것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동그라미 안쪽 골목에 머리카락이 긴 꿈과 잠이 있다
연탄가스를 맡은 날이면
흑백 꿈을 꾸었다
바위 위에 앉은 요정이 긴 머리를 빗으며
뱃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 주곤 했다
생이 무거운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음률에는 축복과 재앙이 함께 담겨 있다
어떻게 사이렌siren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느냐 하면
김칫국물로,
할머니가 주시는 김칫국물을 마시면
되돌이표와 함께 긴 세월에 걸쳐 돌아올 수 있었다
-전문(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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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23-봄(52)호 <근작시> 에서
* 권현형/ 1995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밥이나 먹자, 꽃아』『포옹의 방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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