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왜냐하면, 카프카/ 권현형

검지 정숙자 2023. 3. 13. 00:59

 

    왜냐하면, 카프카

 

    권현형

 

 

  폭설을 뚫고 끝없이 걷기 위해

  날마다 스탠드 전원을 켜고 잠들었다

  그러나 되돌이표를 자주 사용하는

  습관 때문에 도착하지 못했다

 

  꼭 한 번 동그라미 안쪽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존경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질투한다거나 그런 감정이라기보다

 

  눈과 귀를 오래 붙드는 풍경이나

  동화책 속 달콤한 활자에 가까운 것들이 동그라미 안에 있기 때문

  이다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그리워지는 기억 덕분에

  소리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울었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사이렌의 부름 같은 것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동그라미 안쪽 골목에 머리카락이 긴 꿈과 잠이 있다

 

  연탄가스를 맡은 날이면

  흑백 꿈을 꾸었다

  바위 위에 앉은 요정이 긴 머리를 빗으며

  뱃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 주곤 했다

  생이 무거운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음률에는 축복과 재앙이 함께 담겨 있다

 

  어떻게 사이렌siren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느냐 하면

  김칫국물로,

  할머니가 주시는 김칫국물을 마시면

  되돌이표와 함께 긴 세월에 걸쳐 돌아올 수 있었다

    -전문(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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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 2023-봄(52) <근작시> 에서

  * 권현형/ 1995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밥이나 먹자, 꽃아』『포옹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