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새
이혜미
책장을 넘기며
날개를 꺼낸다
어두운 페이지를 깨트려
주어진 여백을 따라
갈피의 빛을 배웠지
펼치면 달아나는
새의 기척은
작은 속삭임에도 눈가를 물들이던
떨림이 주파수를
숨은 우리가 창조한 공기의 단위
투명하게 펄럭이는 깃발이었어
좋아해
밭아진 소리를 주고받으며
여기를 만들어내는 모험을
오래 머금어 깊숙해진
부름을
책이 수많은 빈틈으로 이루어진 건축이라면
접힌 그늘만큼의 부피를 품어 안겠지
공중을 안쪽으로 당겨 앉히기 위해
호흡의 태엽이 조금씩 감겨드는 지금
엎질러진 의미들이
손가락을 딛고 날아간다
속삭여봐
호수를 은빛으로 채점하는 물수제비처럼
사이에서 자라난 낱말들이
새로운 방향을 얻도록
무수히 깃털을 내어놓으며
틈새를 태어나게 하는 휘황으로
-전문-
▶우리(cage)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we)는(발췌) _김효숙/ 문학평론가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의 소회를 다양한 상징으로 보여주는 시다. '숨 · 호흡 · 밭아진 소리' 같은 생명의 기운, '여백 · 갈피 · 빈틈 · 틈새' 같은 텍스트의 무한한 공간, '낱말 · 의미' 같은 개념적 정의들이 화자가 만나는 책에 숨겨진 것들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든다. 우선 "숨은 새"를 책갈피에서 만났다는 발언부터 동화와 신화가 결합한 신비감을 조성한다. 책을 숲으로 환치한 상상력은 태고의 감각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책사랑꾼의 감정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진행하면서 빈틈(틈새)에서까지의 의미를 집어낸다. 화자가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독서 중이라면, 새는 문장의 생명성과 관련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화자는 책장을 넘기며 새의 날개를 꺼낸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새가 날아간다는 상상력은 이럴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장인 "무수히 깃털을 내어놓으며/ 틈새를 태어나게 하는 휘황"은 글의 생명성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이것이 책 읽기를 "좋아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책사랑꾼의 감정이다. (p. 시 76-77/ 론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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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포스』 2022-겨울(창간)호 <『아토포스』가 주목하는 시인/ 근작시/ 작품론> 에서
* 이혜미/ 2006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빛의 자격을 얻어』, 에세이집『식탁 위의 고백들』
* 김효숙/ 2017년 ⟪서울신문⟫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소음과 소리의 형식들』『눈물 없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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