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라는 상자
유미애
고양이는 닫힌 악기다
궤적의 예술가다 고양이의 철학이 넘치는 골목에서 수직의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깨닫는다 고양이는 무릎 위의 먼 세계라는 걸
이 고독하고 우월한 종種은 양탄자 위의 봄볕처럼 우리를 간질이다 저녁 묘지의 베일 속에서 분열한다 천사와 악마가 마주보는 얼굴은 갈채에 목마른 신의 모조품, 호기심을 숭배하는 발톱은 세상을 할퀴며 질문한다
안과 밖이 모호한 고양이는 제 발자국을 사원으로 가진 구도자, 배회하는 밤의 광대, 모든 별을 꿈꾸고 파헤치는 우주의 부랑아다 타자의색에 물들지 않는 이방의 음이다 고양이의 기타에 불이 켜지면 어둠의 밑바닥마다 팝콘이 터지고 벙거지를 눌러쓴 달동네 꼭대기 방은 방랑의 도시로 나간다
고양이는 흔들의자와 뒷골목이 엮은 이야기 꾸러미, 금붕어가 잠꼬대로 튀겨낸 초신성, 장미의 붉은 숨을 갈망할 때도 금간 접시 위, 생의 비린내를 탐구할 때도 고양이는 고양이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양이를 연주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녀석이 수시로 몸을 핥는 건 제 몸의 공명을 잠재우기 위한 것, 고양이는 고양이만 열 수 있는 문이다 건너편에 놓인 의문의 상자다.
-전문(p.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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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포스』2022-겨울(창간)호 <아토포스 시인들/ 신작시> 에서
* 유미애/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손톱』 『분홍 당나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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