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18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극지 行」외 4편>
극지 行
정숙자
한층 더 고독해
진다,
자라고
자라고
자라, 훌쩍
자라 오른 나무는
그 우듬지가
신조차 사뭇 쓸쓸한
허공에 걸린다
산 채로
선 채로, 홀로
그러나 결국 그이는
한층 더 짙-푸른
화석이 된다
-전문(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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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검空劍*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 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 ···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전문(p. 21)
* 공검空劍 : 허虛를 찌르는 칼(필자의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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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 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 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도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 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 ···나는 아마도 먼 먼 어느 산 너머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 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 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목숨 아낄 리 없지
-전문(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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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형 인간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죽더라도
단 한 번 가슴 속 얼음을 녹이고 싶지
-전문(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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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 곁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햇살 개미 멧새들··· 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 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전문(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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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2-겨울(88)호 <특집_제18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자>에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제32회 동국문학상, 제9회 질마재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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