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정숙자 시집『공검 & 굴원』/ 해설 : 권성훈

검지 정숙자 2023. 1. 18. 14:39

<해설>

 

    성속聖俗 시인의 사유 재산

       -『공검 & 굴원』 (미네르바, 2022)

 

     권성훈/ 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혼자란 얼마나 오래 익힌 석류 알인가.

  「1인의 눈물」중에서

 

  1.

  어떤 시인은 이성으로 해독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사유를 탐구하며 세계를 건너간다. 그 속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성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는 명검같이. 한 번 칼집에서 나온 칼날은 결코 명검이 될 수 없듯이 양날의 기표와 기의를 가진 시는 신성함 속에서 현현된다. 세속의 세계 안의 정화된 존재 양식처럼 번득이는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시편은, 성화된 언어의 집에서 수많은 의미를 방출하는 것. 거기에 언어로 탈구된 환원의 심금은 경험적으로 분산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들을 행간에서 통합하는 사유의 자리다.

  이 사유의 자리는 불확정적인 공간 사이에서 통념으로 점령하지 못하는 운동성으로 나아간다. 한 편의 시가 되기까지 태초의 고요와 같이 점점 견고해지는, 편안해지는, 몸에 딱 맞는고요. 나는 태어나지 않(「힉스입자」)은 여백의 입자다. 그 언어의 지층에는 카오스의 기억에서 코스모스의 상상력으로 세계의 물음을 기록하는 것. 빅뱅과 같이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지 않는데 잡히지도 않는데(「먼 곳에서 도는 새벽」) 파동치는 연쇄적 작용으로 새로운 인식을 불러 모은다. 이 같은 시인의 지각 능력은 고유한 언어의 질서로 현존하며 문자의 조각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개별적인 대상을 지식으로 국한시키거나 기술적으로 충당하지 않는, 감각적인 사유 자체다. 이를테면 시인이 모순을 부질없음을 초저녁별이 어둠을 본 만큼드러내는 체험의 귀환이며 은유화된 기억의 환원이다.

  정숙자 시인의 이번 시집공검 & 굴원은 보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세계를 통한 지적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같이. 그녀는 보편적인 사유를 가지기 위해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성을 성과 속으로 탐독한다. 그럴수록 죽어보지 않았으면서 너무 쉽게 죽음을 들먹거리지 마라(풍화비風化碑)하면서. “진짜 죽음을 만나봐라 죽음이 얼마나아프고, 무섭고, 춥고 그래도 돌아보고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어둠을 아는 자가 그녀다. 여기서 죽음을 통과한 언어는 슬프지도 않은데 막 눈물이 나. 주룩주룩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눈물이 나. 이 눈물이 뭔지 나도 몰라. 막을 수도 없고, 막고 싶지도 않고 그냥 눈을 뜨고 있는데 눈물이 나(「공무도주가公無渡酒歌)는 삶처럼. 시는 순간적으로 시인도 모른 채 미친 듯 언어의 샘에서 터져 나오는 기표의 방울인 것.

  이제 극한까지 죽음을 밀고 간 그녀는 삶을 통해 죽음을 지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벗어난 죽음의 영역으로 보지 않고 삶 그 자체를 무성한 죽음에의 뿌리로 인식하고야 만다. 삶을 삼킨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고여 있는 것이 삶일 뿐. 마치 삶이란 이미 깃들어 있는 죽음 속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떠다니며 죽음에 가 닿으려고 하는 역동성이다. “겹겹으로 죽음에 포위된 자는 죽음은커녕 삶에 대해서조차 한마디 못하고 마(「퀴리온도」)는 것 같이.

  누구나 한 치도 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삶은 제 속에 들어와 있는, 고여 있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거기서 움직이는 가벼운 삶으로는 바위와 같이 무거운 죽음을 들어낼 수 없다. ‘침묵이 급습하고 죽음이 덮쳐버리는순간 아무 색도 아닌 시간이 떠내려가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꽃 잃고 잎 지우는 바위눈뜨고 말 묻고있는 외로 나앉아버리는 바위에서 뚝 떨어진것이 죽음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서 돌로 분화하는 것처럼 죽음의 파편이 바로 삶인 것. 죽은 생선의 눈에서 저 머나먼/경계 밖을 읽어내듯이. 그녀는 죽어본 적 없으면서 겁 없이 죽음 희망’”경험일 수 없는 죽음 속에서사유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시는 학문과 지식은 물론 과학이 다가서지 못하는 영역에 있다. 그러면서 지식의 영역과 학문의 영역을 공존시키며 자연과학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녀의 고유한 언어로 자신의 고독을 시 의식으로 완성 시키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는 그녀라는1인의 눈물여백의 들녘에서 흘린 눈물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끝까지 혼자일 수밖에 없는 돌멩이 하나와 같이 세공된 기억이며 사유의 응집이며 삶의 해체로 관철시킨다. 이제부터 우리는 정숙자가 흘린 “1인의 밤의 눈물은 천지에 뿌려진 이슬. 검푸른 길에 총총히 서려, 뿌리 끝 하늘만 맺어있는 죽음에의 검푸른 길이라는 세속 속에서 이슬처럼 맺혀 있는 성스러움을 표상하며 지식으로 도저히 해명하지 못하는 사유의 뿌리를 보게 된다.

 

 

  ,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 …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공검空劍」전문

 

  그녀의 시편 공검굴원은 이번 시집의 표제작으로서 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공검空劍은 정숙자 시인이 언어로 출산한 를 찌르는 칼이다. 언어로 기름 부은 공검은 명검으로서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데 있다. 이처럼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고도 알 수 없는 무엇이면서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가는 초월적인 사유로서 성스러움을 간직한다. 이와 같은 언어는 존재에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도 파고드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그녀는 이 새벽을 건너는 자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라고 명명한다. 그럼으로써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는 신성함을 드러낸다. 마치 수천 개의 손과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같이. 관세음보살이 팔과 눈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구제할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이며 광대무변함을 나타내는 신성성이다.

  공검은 바로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같은 세계 속에서 천수천안의 화신으로 하나의 기표에 수많은 기의를 파생시키는 데 있다. 이를테면 물이었던 기의를, 물결이었던 기표를, 호수였던 둘레를 그 모두를 응집한 거울(「얼음 π」) 속에서 겨울을// 쨍그랑- -/ 깨뜨려 버려(···)/ 끝없이, 끝없이파동치는 것이다. 마치 고대 중국 시인 굴원(BC 340~278, 62)과 같이. 정치가로서 국사를 도모했던 굴원은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시를 남긴 시인으로 중국의 이백과 두보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작품은 차고 넘치는 격한 울분의 감정이 배태되어 있으며, 말년에 쓴 장시에는 억울함을 피력하고 호소하는 한시들이 눈에 띈다. 또한 유배와 복권으로 모함을 받던 굴원은 결백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중국 멱라강에 돌덩이를 안고 몸을 던져 자살할 만큼 충정과 결기가 두드러진다.

  정숙자 시인은 중국 고대의 굴원을 발굴하여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을 소환한다. 이 눈물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굴원에 대한 기억이며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으로 그의 투강 전야에서 수면으로 건져 올린다. 이처럼 형상화된 굴원을 통해 공검을 제시하며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를 묻는다.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 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목숨 아낄 리 없지라는 다짐은 굴원과 같이 살기 원하는 그녀의 신성한 맹세다. 그것은 응시에 응시를 거듭한 내 울음은/ 단단한 배와 가슴을 뜯어 먹혀도/ (다만) (홀로) 눈물 지필 뿐”(녹청) ‘다만’ ‘홀로와 같이 칸칸마다 들어있는 시인의 온전한 울음’”으로서 외로움에 대한 단절이 아니다. 고독이 완성하는 진정 울음이란 가슴 미어지는 소리를 동반한 피의 외출인 것이다. 여기서공검은 끊임없이배출되는데 바닥으로부터 뛰어내릴 각오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할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각오까지. 그러므로 그녀가 가공한 공검의 한 줄 한 줄은/ 고독이 흘린 말 받아 적은 말이며 고독과 공검/ 핏기도 없이 피어린 삶의/ 칼집 속 칼날의 붕괴된 침묵의 잉여물이 아닐 수 없다.

 

 

  2.

  지금 정숙자 시인은 마침내 죽음과 같은 고독으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고독양식장〕】(「진무한」)이라고 칭하고 여기서/ 환상 저/ 고독이 날 점령하기 전 내가 장악해 가는 것. 그럼으로써 그녀의 시편은 사적인 시간과 공간의 거듭남으로 성장한다. 거기에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성스러운 것은 우주를 설명하는 원리이면서 세계의 규칙을 묘파하는 데 쓰인다. 신과 만나는 공간 성스러운 공간에서. “고대 사회의 인간은 성스러운 것 가운데서 혹은 성화聖化된 사물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여 살려고 노력했다. 이후 모든 전근대적인 인간에게 성스러운 것은 힘이며, 궁극적으로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것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 성스러운 힘은 실재를 의미하며 동시에 영원성과 효험을 의미한다.”1) 그녀의 시편은 세속의 공간에서 가득 차 있는 성스러움을 통해 존재를 성스러운 존재자로서 관계 맺고 있음의 역량을 강박적으로 보여준다.

  성스러운 것은 그것만으로 그녀의 시편에서 충족되지 않고 속된 것과 양분화되면서. 성과 속의 양상을 엘리아데의 주장처럼 그녀의 시편에서 세 가지로 축출할 수 있다. 첫째 원래는 모든 것이 성과 속의 구별 없이 범성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둘째 성이 속에서, 속이 성에서 나온다는 분파적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성과 속의 구분 없이 동시에 나온다는 성속의 차이를 반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로써 사유가 자라고/ 자라고/ 자라, 훌쩍/ 자라 오른 나무(「극지 行」)로서 그 우듬지가/ 신조차 사뭇 쓸쓸한/ 허공에 걸어 놓은 한층 더 짙-푸른신성함으로 머문다.

  * M. 알리아데. 이은봉 역, 『성과 속』, 한길사, 1998. 50쪽.

 

 

  우리는 거기, 그 안에서 덤벙거린다

 

  그 시력은 퇴화되지 않는다

  밤에조차 감지 않지만

  어떤 한마디도 흩지 않는다

 

  다 알면서 다 봤으면서도

  누가 무엇에 걸렸을지라도

 

  비할 바 없이 따뜻하고 맑고 조용한

  그 눈이야말로 (그러나)

  가장 무서운 눈일 수 있다

 

  총괄적으로 담담한 그 눈이야말로

  그만의 비공개적

  합목적적 눈일 수 있지 않은가

 

  하. 그러면 어때. 내 눈이 그 눈을 속이지 않는다면 그 눈도 내 눈을 속이지 않는다. 걱정 없다. 그저 걸으면 된다. 그 눈은 사심 없는 눈. 인간으로선 도저히 ‘모방’에도 접근할 수 없는 눈. 개벽 이후 하루에 단 한 번만 껌뻑이는 눈.

 

  그 큰 눈을 믿고 골짜기 물은 절벽에서도 힘차게 뛰어내리지. 호수는 돌에 맞아도 굴렁쇠를 굴리며~ 굴리며~ 굴리며~ 웃지. 더 많이 아픈 가슴이 더 많이 사는 거라고 믿지. 태산이 무너져도 그 눈에 기대어 새파란 무릎을 찾지.

 

  우연히 발견한 책상 밑 아기 거미 마른 주검을

  차마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

 

  고만고만한 그런 눈들도 그 큰 눈은 다 보고 있지

  다 알고 있지. 다 다 다… 기억도 하지. (그러니)

 

  하. 그때 좀 그런 게 어때

  흑. 지금 좀 이런 게 어때

    -「정오의 눈」전문

 

  태양이 일직선에 있는 정오는 그림자가 소멸된 상태로 오후의 시작이다. 여기서 오후의 정오는 태양이 가장 강렬하면서 아무 음영도 없는 백지와 같이 위대한 고요의 순간이 된다. “다 알면서 다 봤으면서도/ 누가 무엇에 걸렸을지라도모르는. “비할 바 없이 따뜻하고 맑고 조용한성스러운 상태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성스러운 세계에서 우리는 거기, 그 안에서 덤벙거리면서 그 시력은 퇴화되지 않는모든 존재가 신성한 세계의 눈으로 유입된다. “그 눈은 사심 없는 눈. 인간으로선 도저히 모방에도 접근할 수 없는 눈. 개벽 이후 하루에 단 한 번만 껌뻑이는 눈이다.

  ‘정오의 눈을 아는 자는 고만고만한 그런 눈들에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처럼 그 큰 눈은 다 보고 있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오는 창공의 불은, 빛은/ 그의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데카르트의 남겨둔 생각」) 그녀의 지탱해준 성스러운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사색을 정오까지 밀어 올리면/ 여지없이 저쪽으로 서쪽으로 굴러떨어져/ 바다 깊숙이 잠겨버리지 않는영속성을 지닌다.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 는

 

  썰이 횡행한다

  하지만 도플갱어를 어디서 만날 수 있나

 

  때론 그를 보고 싶었고

  딴은 맞닥뜨릴까 봐 무섭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그를 만났는데도 내가 (혹은) 서로 못 알아보고 넘어간 건 아닐까,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건  어느 신비주의자가 내건 그림이 아닐까

  그런  허구가 온전한 줄기로서 이토록 세상에 너울거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가 어디 사는지··· 어느 때 마주치게 되는지···그와 정식으로 마주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까지도···그것이 진실이라는 심증도 어렴풋 만져진다. 출구 없는 자신을 만났을 때, 거기 (정면으로) 서 있는 자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눈

  한순간 맞부딪쳐 버리는 자기 자신의 극한의 눈

 

  , 벼락

 

  에 타버리는 것, 죽는 것이다

 

  ∴ 첨예한 고통과 고독을 응시할 때는

  반드시 한쪽 팔 잡아줄

  햇빛 나누어 줄

  디오게네스에게 미리   필히   연락해둘 것

 

  (추신: 그러므로 아픔들이여! 그렇게까지는 자기 자신을 몰고 가지 말 것)

    - 「거기 (정면으로) 서 있는 자」전문

 

  성스러운 것의 현현은 특이한 상황이나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플갱어처럼 알면 어디서 만날 수있는 것이며 모르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진리 밖에 있는 자, 진리 위에 잠자는 자 진리를 알 수 없듯이. “온전한 줄기로서 이토록 세상에 너울거릴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성스러움이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위대한 정오의 태양같이 막다른 골목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눈이 있어야 하고, “한순간 맞부딪쳐 버리는 자기 자신의 극한의 눈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아울러 첨예한 고통과 고독을 응시가 수반되어야 한다. ‘, 벼락’ ‘( )’ ‘추신:’ 등의 낯선 기표와 부호 그리고 파격적인 비언어는 언어가 통과하지 않는 부분에서 비의를 산출할 때 작용한다. 이러한 시에서 낯선 수법에의 제동과 지각의 지연을 통해 그건  어느 신비주의자가 내건 그림그런  허구가 온전한 줄기를 상상할 수 있다. 이에 막다른 골목에서도/ 사원이며 첨탑이며 등불(「book-풍」)로 밝히는 신성한 언어로서 구원의 표상이다. 이처럼 그녀의 시편은 벗이며, 신이 되면서 절대적으로 나는 그, 벗을 오래 믿었고/ 나는 그, 분을 오래 기댔고/ 나는 그, 신을 오래 섬겼지라는 치유적인 소고가 뒤따른다.

 

 

  3.

  그녀의 시에서 모든 존재가 성스러움에서 비롯되는 반면 성이 속에서 또는 속이 성에서 출몰하기도 한다. 성이 속에서 나오는 것은 속이 성에서 나오는 관계와 같이 주술적인 데 있다. 성스러운 것의 기원은 불순의 개념이 있음으로 가능하고 속된 것 또한 성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인류사에는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의 구분이 없었지만 터부가 발생함으로써 금기의 대상이 생겨났다. 성의 현존 안에서 숭배와 외경심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불순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금기와 위반의 시작이다.

  요컨대 성과 속의 구획은 칼집 속의 칼과 칼집 없는 칼(「급류」)과 같이 붉고 푸른 각종 칼들은/ 흐핫, 명명되기 이전에 벌써/ 위치와 용도가정해져 있다. 칼집에서 나온 칼은 성과 속이라는 양면 중 한 번의 선택만으로 숭배가 되고 불순이 된다. 거기에 성과 속을 가로지르는 죽음은 생애를 새롭게(「일차 초상화」)하는 것과 같이 속된 것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실제는속이 성으로 전환 되는 것에 있다. 그것도 사후 세계에서가 아니라/ 그의 무덤 밖/ 타인 안에서성화된다. 성과 속이 어떻게 현현되는지는 짧고, 긴 삶/ 짧고, 긴 죽음과 같이 어떻게 배치하는지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그 공간은 애매와 모호가 물결치는 곳(「잎들의 수화」)으로 성과 속은 모호한 경계에 있다. “서로 다른 눈금과 눈금-잣대와 잣대의 촉수들이 충돌하는 것 속에서 성과 속은 파생되기도 한다.

 

 

  하나의 죽음은 또 하나의 죽음을 안내한다

 

  조금씩 조금씩 낯설지 않게

  친숙의 문까지를 열어 보인다

 

  고요한··· 고독

 

  그것에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온종일 전화벨 한 옥타브 튀지 않아도

  새소리만 멀리 걸려도,

 

  중심에 죽음이 있다

 

  일주일은 왜 열흘이 아니고 칠일인가?

  그런 촉박促迫도 어지간히 둥글어졌다

 

  삶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먼저 ‘ㅁ’이 그리고 ‘ㄹ’이 그리고 ‘사’만 남는다. 거기서 또 한 획 멀어진다면 ‘시’만이 남게 되겠지. 최후까지 남는 게 시였다니! 그리고 조금 더 훗날 ‘ㅅ’만 남게 된대도 내게는 태양이야. 시옷, 시옷이니까.

 

  홀로 떠 있다 보면 어떤 돌이나 행성이라도

  바람과 안개에 의해

  그 긁힘과 마모에 의해

  최종의 뼈마저도 해체/봉인되겠지

  그리고 다시, 거기서 다시 잎이 나겠지

 

  어둡지 않고 차갑지 않은

  삶보다는 수 광년 진화된 하늘

  먼저 간 죽음이 타전해 오는 새로운 의미의

  확장, 일체의 혼란 바꾸는 죽음

    - 「죽음의 확장」전문

 

  죽음을 성과 속으로 단정 짓기 위해서는 중심에 죽음을 무엇으로 배치하느냐의 문제다. 성에 중심축을 두게 되면 죽음은 성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며, 속에 중심축을 두게 되면 죽음은 속된 것이 된다. 이를테면 하나의 죽음은 또 하나의 죽음을 안내한다라고 했을 때 발화자가 택일한 성과 속이 되는 것이다. “삶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듯이 선택적으로 죽음이 신성한 것이 되면 삶은 속된 것이 되는 것이고, 죽음이 속된 것이 되면 삶은 신성한 것이 되는 이치다.

  성과 속은 죽음과 같이 고요한··· 고독에서 출생하는 것으로 먼저 간 죽음이 타전해 오는 새로운 의미로서 해체되고 봉인되는 것에 있다. 말하자면 썩어나가는 이 마음은 썩어나가는 불꽃(「크로노스」)썩어나가는 불꽃으로 피워야 할 꽃을어디에 심는지에 따라서 전이된다. 메마르고 버려진 속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지렁이야, 지렁이야, 아직 파란 지렁이(「봄은 끈이로되」)처럼 속에서 성이 나오는 것. 이때 지렁이는 신성한 그 무엇으로 전환되면서 그것은 육체보다 더 푸른/ 정신 혹은 파장일 수(「화살과 북」)도 있게 된다.

  성과 속은 그녀의 시편에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진 부처만큼이나 많은 머리를 가(「멜랑꼴릭 메두사」)진 메두사의 얼굴이면서 매력적이고/ 마력적이고/ 치명적이기까지, 하다(「악무한」) 그러므로 성과 속이 합일된 반가사유는 성과 속이 승화된 반가사유의 형상를 보여준다. 이는 그녀의 수뇌부에서 결정/지시함으로써 가장 그립고 가장 숭고한/ 대상의 이름을새겨 넣는 것 속에서 발생한다.

 

 

  4.

  그녀의 시편에서는 격리된 지점에서 성과 속이 동시에 나오기도 한다. ‘얼음 과 같이 (「사유-재산」) 공간적 분리와 비유용성 속에서 전개된다. 빙하가 녹지 않는 얼음산은 높고 위험하며 접근하기조차 힘들다. 게다가 별조차 굳어버린 빙벽 아래위치해 있는데 에베레스트산과 같이 신성시되어 왔다. 그러므로 얼음산의 하늘 쪽으로, 하늘 속으로 추락을 거듭한 빙-정상은 신성한 공간이며 정상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속된 곳이 아닐 수 없다. 얼음산의 경계 안쪽과 바깥은 동시에 성과 속의 공간이며 사유의 산/ 사유의 재산이. “분출되지 못한 슬픔 안쪽에서 위로받지 못한 어깨 근처의 바깥쪽은 성과 속을 계획한 그건 매우 정교한/ (신의) 프로젝트라는 언술이다.

  여기서 갈라지는 길목은 미래로의 지시(「결국, 나도 나무가 되었다」)가 된다. 성과 속이 동시에 한 가지가 둘로 갈라지면서··· 거기서 자란 한 가지가 또 둘로 갈라지면서··· 나무는 그렇게 본래의 하나로는 돌아오지 못하면서나타난다. “갈라짐  갈라섬 피할 수 없는 관계들 모두가 성과 속을 대변하는 주술이다.

 

 

  이제 나는 그가 된다. 그가 열다 만 골목, 그가 띄우다 만 달빛, 그가 젓다 만 물살··· 먼 데까지··· 식물들이 습득한 일념을 빌려 쓰고자 한다.

 

  알 수 없지만

  장차 내가 되고자 하는 그가

  어떤 초상일지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머나먼 강둑에서 만나게 될, 그를

  침묵과 함께 출발시키려 한다

 

  나란히 날아가는 두 마리의 잠자리. 이 둘은 멈추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름이 바람이 구름이 바람이 뒤로 밀릴 뿐. 이 둘은 서로 놓치지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를 현상을 놓아 보낸다.

 

  예사로운 하늘만이 예스러운

 

  내가 아직 흙이었을 때

 

  뿔뿔이 벋은 길들은 강들은 저절로 가지 쳤을까. 헤쳐모인 돌들은 꽃들은 저절로 둥글었을까. 낭떠러지와 별 따위도 저절로 그리 깊어졌을까. 그 모두 누군가 비우려던 (덜 태운) 절규는 아니었을까.

 

  떠난 자는 슬픔뿐! 슬플 뿐!

  이제 나는 그가 된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잠자리를 두 마리라 해도 두 마리의 잠자리를 한 마리라 해도 틀리지 않다

  나는 비로소 입체적이다

  탑재된 눈물 밖 삼인칭과 일인칭 사이

  너무나도 조용한 밑변 위에서

     - 「랑그의 강」전문

 

  성과 속은 동시에 나란히 날아가는 두 마리의 잠자리와 다르지 않다. 또한 이 둘은 서로 놓치지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를 현상을 놓아 보낸다그러면서 성과 속은 뿔뿔이 벋은 길들은 강들은 저절로 가지를 내린다. 시인은 이 지점에서 머나먼 강둑에서 만나게 될, 그를/ 침묵과 함께 출발시키면서 해방시키는 자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침묵은 성과 속이 탑재된 눈물 밖 삼인칭과 일인칭 사이/너무나도 조용한 밑변 위에서입체적 언어로 세공된다.

  그녀의 입체적 언어는 더 이상 밀릴 곳 없는 가장자리, / 절벽(「 水-밀도」)에서 출현한다. 거기에 물은 물로써 공기는 공기로써/ 서로 밀치며 서로서로 섞이며/얽히고설켜도 보이지 않는 망으로 포획된다. 이 언어의 망에는 뛸 수도 없는  죽은 자들을 뛰게 하고 날 수도 없는-죽은 자들날게 하고 길 수도 없는-죽은 자들

(「액땜」)을 기게 한다. 이로써 내 삶을 둘러주는 집/ 속의 작품집···들/ 그 실다운, 뼈아픈 별들(「틀 효과(framing effect)」)이 탄생하는 것이다.

 

 

  5.

  그녀의 이번 시집은 액체 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 이어서 10번째 시집으로 5년 만의 일이다. 거기에 미망인으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가운데 이보다 더한 혹한이 또 닥칠 것이다(「저울추 저울눈」)를 새기면서.

  때로는 그것은 견딤으로 때로는 그것은 겪음으로 시를 발견하며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 얇은 껍데기 속에 견딤과 겪음을반복해 왔다.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 허구가 아니라는 것의 사색 속에서 견디지 않아도 되는 전제란/ 겪지 않아도 되는 존재란/ 그런 생애란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여기 정숙자 시인의 견딤과 겪음으로 태동한 시편들은 언어의 허점을 제거하고 견고한 시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그녀의즐겨참기에서 외로운 응전절제된 적응에서 출산한 것으로 견딤은 참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견딤은 강제된 인내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바로사라진 말들의 유해를 찾아서 말없이도 말이 되던 말다운 말어떤 말에도 파묻히지 아니하던 실다운 말에 대한 근원적 탐구가 아닐 수 없다.

  그 속에서 그녀는 성과 속의 원리 가운데 스스로가 사유하고 만든 시신詩神은 대상을 분해하지 않고도 처음과 끝을 알 수 있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지 않는 존재다. 이처럼 신은 항상 (어디서나) 출발하는 자이며/ 결론짓는 자이며/ 진행자(「야학(野鶴)」) 역할을 외로이 외로이 그리고/ / 서늘히// /(「피어, 書」)로 수행해 왔다. 그것도 그 눈은 자꾸 질문하면서 내 눈과 말을 자신의 눈 속에 저장하(「자력선」) 는 헤테로토피아의 사유 정신을 가지고.헤테로토피아는 푸코의 에세이집으로 유토피아의 대비되는 공간을 통해 사유 실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그녀는 내가 보고 싶은 건 안 보이는 것이라는 비의식적 사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정숙자 시인의 시편은 성스러운 것의 경험으로 세속적인 것의 덧없음을 말하지 않으면서 세속적인 믿음으로 삶과 죽음을 통과한다. 이때 삶은 그녀가 생산한 죽음의 조각이며 세속적인 것도 성스러운 것도 아니면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명명으로 공유되고 사유로서 교차된다. 이로써공검 & 굴원은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사유思惟의 재산財産으로, 또는 공유의 여운으로 출렁일 것이다. ▩ (p.132-153) (권성훈/ 문학평론가 ·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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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공검 & 굴원』에서/ 2022. 5. 16. <미네르바>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