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
고영
하릴없이 집 안에 들어앉은 뒤부터
아버지에겐 전에 없던 뒷짐 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면장이라도 된 줄 아느냐고 타박을 놓곤 했지만
생활이 먼 산山으로 올라갈수록 뒷짐은 더욱 견고해졌고
느려터진 걸음걸이만큼이나
아버지의 말문도 점점 벽이 되어갔다
권위나 권능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아버지의 뒷짐은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어울렸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마실이라도 나가는 날이면
나도 뒷짐을 지고 흉내를 내곤 했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허물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뒤를 따르는 동안
뒷짐이 꼭 포승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창문 밖을 기웃거리는 기척이 있어 몰래 나가 보니
술 취한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그때 뒷짐에 쥐어진 풀빵 봉지를 보며
어쩌면 나는 아버지가 이 지구별에 흘린 뒷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후
몇 번의 이삿짐 위로 꽃이 피고 눈이 내렸지만
아버지의 뒷짐은 풀리지 않았고
입관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아버지는 뒷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전문(p. 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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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시대』 2022-가을(26)호 <신작시> 에서
* 고영/ 200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딸꾹질의 사이학』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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