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가 되는 날
이영식
우두커니라는 말이 좋다. 아니, 좋아졌다
당초에는 '얼빠진 듯 멀거니'라는 사전적 풀이로 거부감을 가졌는데, 그런 무력감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서 있거나 결가부좌로 버티는 자세가 떠올라 왠지 든든하고 믿음이 가는 거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태백산 주목나무 군락을 보라. 고사목인 채 우두커니, 오직 우두커니의 힘으로 눈 · 비 · 바람과 절대의 고독을 견디며 서 있다.
텅 빈 백지 앞에 며칠째 앉아 있는 나. 멍때리기 전문가 다 되었다. 김수영이 말하듯 온몸으로 밀고 또 밀고 가서는 뼈와 살점 몽땅 갈아 빚은 시 한 편 물어뜯으려 은유의 맷돌 앞에 앉았는데, 어라? 어처구니가 없다. 한 걸음도 떼어놓지 못한다.
그냥 그렇게 또, 우두커니가 되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고사목 같은 맷돌 같은 나의 고독을 믿는다. 주목 향불보다 더 깊고 향그러운 시 한 편 기어이 써내고야 말 것이니.)
-전문(p.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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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시대』 2022-가을(26)호 <신작시> 에서
* 이영식/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꽃의 정치』『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