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그런 게 아니라고/ 박수현

검지 정숙자 2022. 12. 10. 02:22

 

    그런 게 아니라고

 

     박수현

 

 

  이런,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내 맨얼굴이 떠 있는 거야 마스크 챙기러 올라갔다 내려와서 보니 이번엔 손에 쥐고 있던 자동차 키를 놓고 온 거야 지난여름 휴가 땐 리조트에 도착하고 나니 옷 트렁크가 보이질 않더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그냥 버려둔 거지 가까운 휴게소에서 산 애꿎은 바지 한 장과 팬티 한 장으로 나흘을 꿋꿋이 버텼어 그땐 미니멀 라이프를 제대로 실천해본 셈 쳤지 아버지 제삿날은 역까지 가서야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걸 알아챘어 카드며 기차표 다 폰에 들어 있어 종당 집으로 되짚어 갔던 적도 있었지 그뿐 아냐 핸드폰을 웃옷 주머니에 넣은 채 세탁기를 돌려버렸지 뭐야 액정 고치는 데 80만 원이나 든대서 옛날 꺼 갖다가 사용하고 있지 하! 어쩌면 좋아 대뇌피질이 맛이 간 전기회로처럼 뒤죽박죽 갈팡질팡 머릿속이 쿨링팬이 망가진 것처럼 화끈, 열이 올랐다가 한순간 세상이 표백제에 담가둔 것처럼 하얘져 설마 나 치매는 아니겠지 그렇다고 말해 줘 필경 지난 사고 때 한 전신마취 수술 탓일 거야, 그치? 제발 그렇다고 말해 줘 근데, 너 왜 아까부터 실실 웃는 거야? 잇바디 끝까지 길게 쪼개며 웃는 거야 지금도 내 혼백까지 솜틀에서 솜을 틀듯 탈탈 틀리는 것 같아 웃지만 말고 말해 달란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고

   - 전문(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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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창작』 2022-겨울(172)호 < 2000년대 시인 신작시 특집> 에서

  * 박수현/ 2003년『시안』으로 등단, 시집『샌드 페인팅』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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