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나무 외 1편
김윤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가 그린 참나무 한 그루
외톨이의 비밀스런 고집을 잉태한 채
초원 한가운데 서 있다
홀로 자리 잡은 은자처럼 깊고 그윽한 풍경 속
푸른빛으로 서 있다
무릎 아래 잔잔히 물결치는 풀들의 안부를
뒤적여보고 있는 나무
속에 깃든 흔들리지 않는 영혼이
눈길 닿는 가지마다 서늘하다
카스파르 다비드가 그린 한 그루 참나무를 보며 가끔은
나무를 사랑한 헤세를 만나는 일
혹은,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던
헤세의 말을 생각하는 일
사방으로 풀냄새를 되새김질하고 있는 바람
오래도록 초록 길은 허공까지 이어져 있다.
-전문(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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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모두 떠난 재건축아파트
복도식 현관문마다 흰 페인트로 크게 X자가 그려 있다
40년 넘게 새와 바람을 불러들이고
그늘을 만들던 나무들은
빽빽한 나이테를 드러낸 채 밑둥이 잘려 있다
제집을 잃은 새들은
키 작은 나무를 뽑느라 파헤쳐진 흙바닥에
기억의 뿌리를 찾아 부리를 박기도 하고
붉은 발바닥 도장을 찍으며 서성인다
나무들이 다 어디 갔는지
둥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널부러진 잔가지 위에 앉아 두리번거리다 날아간다
강변에서 저녁놀 묻은 발을 끌고 둥지로 돌아온
몇 마리 비둘기
발을 헛딛는다.
-전문(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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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물 속의 사막』에서/ 2022. 11. 15. <문학아카데미> 펴냄
* 김윤하/ 서울 출생, 2000년『문학과의식』으로 등단, 시집『나의 붉은 몽골여우』『북두칠성 플래시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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