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붉은 골목 외 1편/ 안은숙

검지 정숙자 2022. 11. 28. 00:33

 

    붉은 골목 외 1편

 

    안은숙

 

 

  노인이 끌고 온 길은 그곳에서 끝이 났다. 죽은 노인의 머리 위로 고양이 울음이 두 번 지나갔다. 노인이 놓아버린 리어카 손잡이는 노인을 향해있고 기우뚱 서 있는 '고물 팝니다' 푯말은 붉은 녹물을 흘리고 있다. 폐기물 하나 얹어질 때면 일어서는 먼지구름도 멈췄다. 바닥이 움푹 내려앉은 리어카만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고, 허물어가는 담장 위로 담을 오르던 수세미가 멈칫 먼발치에서 내려다볼 뿐, 노인을 마지막 본 감나무에 앉았던 새 한 마리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노인을 가장 잘 아는 골목은 굳게 입을 닫았다.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바람이 끙끙거리며 돌아다닌다. 함께 따라 들어왔던 어둠조차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전문(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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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정오는 정수리에

  그림자를 이고 있는 시간이죠

  밋밋한 그림자에 레이스가 필요해요

 

  햇살을 주워 정오의 치맛단이나

  소매 끝에 붙이면, 졸음이 나풀거리고

  한 시가 되고 두 시가 되죠

 

  그때 시간은 바닥에 눕거나 발목을 휘감고

  비스듬하게 사람들을 따라다녀요

 

  곧 기울어질 정오

  이때 나무들도 바람의 레이스를 달고

  제 키를 보여주죠

 

  검은 레이스, 마치 우리가 명동 성당에서 본

  미망인 프란체스카가 살포시 머리에 얹었던

  검은 미사포 같아요

 

  햇살이 돌아서면

  눈부신 레이스도 사라지죠

  모퉁이를 돌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정오는 지나가는 왼쪽의 방향을 갖고 있어요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당신

  저는 당신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해요

  딱딱한 그 감정에 오늘은

  레이스를 달아주고 싶은 날이에요

    -전문(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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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회 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에서/ 2022. 11. 25. <달을쏘다> 펴냄

  * 안은숙/ 서울 출생, 2005년『실천문학』으로 시 부문 등단, 201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시집『지나가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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