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의 알혼섬에서 외 1편
조연향
풀벌레 소리에 걸려 넘어졌네
바이칼 푸른 혼령의 휘파람 소리, 여기 험난한 길이라는
그 예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들
나는 넘어지지 않았을 거야
따로 노는 몸과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사마귀처럼
자신을 팽개치는 이 마음 누가 꾸짖어 줄 수 없나
햇살이 불편한 혈거인처럼
피멍을 머금고 쓸쓸하게 버둥거리는데
엉겅퀴 꽃이 뾰족하게 웃는다
은신처를 찾아보았으나
능선 어디에도 나를 숨길 구석이 없다
오소리들이 들락거리는 저 보랏빛 구멍에
이 만신창이를 구겨 넣고 싶었다
멀리 하늘이 가물거리고
입을 벌리고 짖어대는 하얀 구름에 섞여
가을벌레 울음소리 바람목에서 흩어져 간다
상처투성이 혈거인을 두고
멀리멀리 태양을 따라가는 알혼섬
-전문 (p.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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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꽃들의 구치소이다
담장 휘어진 가지를 밝히는 봄은
낯선 곳으로 이끌려 온 듯
두리번거리며 꽃의 입구를 찾는다
봄이 꽃의 구치소라는 것을 안다는 듯
꽃들과 봄은 서로의 문을 쉽게 찾는다
아직 그 향기가 남아 있으므로
타오르는 노란 자유의 세계 앞에
딸랑딸랑 새들이 울어댄다
얼마나 아득한 생이었나
잠그고 떠나갔던 시간을 품고
오랜 어둠의 결박을 다시 풀고
깊숙한 밤의 늪 속에서 끌고 온 길들을
부려놓는다
얼마나 까마득한 날들이었나
봄의 입구에서 두리번두리번
누가 나를 여기서 하차하라고 했지
-전문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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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길 위에서의 질문』에서/ 2022. 10. 31. <실천문학> 펴냄
* 조연향/ 경북 영천 출생, 199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 2000년『시와시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제1초소 새들 날아가다』『오목눈숲새 이야기』『토네이도 딸기』, 연구서『백석 김소월 민속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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