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바이칼호의 알혼섬에서 외 1편/ 조연향

검지 정숙자 2022. 11. 18. 02:27

 

    바이칼호의 알혼섬에서 외 1편

 

    조연향

 

 

  풀벌레 소리에 걸려 넘어졌네

  바이칼 푸른 혼령의 휘파람 소리, 여기 험난한 길이라는

  그 예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들

  나는 넘어지지 않았을 거야

  따로 노는 몸과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사마귀처럼

  자신을 팽개치는 이 마음 누가 꾸짖어 줄 수 없나

  햇살이 불편한 혈거인처럼

  피멍을 머금고 쓸쓸하게 버둥거리는데

  엉겅퀴 꽃이 뾰족하게 웃는다

  은신처를 찾아보았으나

  능선 어디에도 나를 숨길 구석이 없다

  오소리들이 들락거리는 저 보랏빛 구멍에

  이 만신창이를 구겨 넣고 싶었다

  멀리 하늘이 가물거리고

  입을 벌리고 짖어대는 하얀 구름에 섞여

  가을벌레 울음소리 바람목에서 흩어져 간다

  상처투성이 혈거인을 두고

  멀리멀리 태양을 따라가는 알혼섬

          -전문 (p. 52-53)

 

 

          -------------------------

    봄은 꽃들의 구치소이다

 

 

  담장 휘어진 가지를 밝히는 봄은

  낯선 곳으로 이끌려 온 듯

  두리번거리며 꽃의 입구를 찾는다

  봄이 꽃의 구치소라는 것을 안다는 듯

  꽃들과 봄은 서로의 문을 쉽게 찾는다

  아직 그 향기가 남아 있으므로

  타오르는 노란 자유의 세계 앞에

  딸랑딸랑 새들이 울어댄다

  얼마나 아득한 생이었나

  잠그고 떠나갔던 시간을 품고

  오랜 어둠의 결박을 다시 풀고

  깊숙한 밤의 늪 속에서 끌고 온 길들을

  부려놓는다

  얼마나 까마득한 날들이었나

  봄의 입구에서 두리번두리번

  누가 나를 여기서 하차하라고 했지

      -전문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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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길 위에서의 질문』에서/ 2022. 10. 31. <실천문학> 펴냄

  * 조연향/ 경북 영천 출생, 199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 2000년『시와시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제1초소 새들 날아가다』『오목눈숲새 이야기』『토네이도 딸기』, 연구서『백석 김소월 민속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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