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민혁_나는 아직도 길의 중간에 있다(발췌)/ 시를 쓰려고 하면 : 최금녀

검지 정숙자 2022. 10. 31. 01:19

 

    시를 쓰려고 하면

 

    최금녀

 

 

  시를 쓰려고 하면 등이 아팠다

  허리를 구부리면 편했다

 

  24년 동안 허리를 구부렸다

  부녀회장 앞에서 구부리고 야채장수 앞에서 구부리고 지하철에서 나오는 어린 청년을 붙잡고 구부리고 아무 데서나 아무에게나 구부렸다

 

  등뼈를 세우면 등이 아팠다

  4월의 봄바람도 등뼈 위에서 구부려졌다

  아무 데서나 접히는 등뼈

  아침에 구부리고 저녁에 허물어졌다

  구부릴수록 남편은 이기고 나는 마을회관 앞에 쓰러졌다

 

  논두렁에서 회관에서 장마당에서

  척추를 앓는 병

 

  아무 데서나 아무에게나

  허리를 내주는 병

 

  구부리다 구부리다 꼿꼿이 세워지지 않는 큰 병을 얻었다

  꼿꼿해지려고 세우면 세울수록 등이 찢어졌다

    -전문-

 

  나는 아직도 길의 중간에 있다(발췌) _박민혁/ 시인

  시인은 1962년 『자유문학』에 「실어기失魚記」라는 소설로 입선한 이력이 있으나, 몇몇 출판사와 잡지사를 거쳐 신문사의 기자직을 이어나가며 생업에 치중하게 된다. 가정이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으니 데뷔와 동시에 작가로서의 긴 공백기에 들어선 셈이다. 이 공백기에는 사실 특별한 이력이 작용한 면도 있다. 직장 선후배 사이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남편이 이후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충북 청원군에서 내리 4선을 지낸 신경식 전 한나라당(현 국민의 힘) 의원이 바로 시인의 부군이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초선의원이 되었으나, 첫 출마한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두 번의 낙선을 경험한 그 당시는 부군과 함께 그야말로 온갖 고생을 했던 시기였다고 시인은 회고했다.

  당시의 얘기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덤덤하게 풀어나가는 시인의 얘기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지금이야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동네 이집 저집의 관혼상제에 두루 참석하여 조용히 그릇을 닦아주고 온다거나, 노인정에 가서 직접 국수를 삶아 어르신들께 대접하는 등의 일들은 다반사였으며, 수수한 옷차림을 늘 유념하고 동네의 수많은 교회와 새마을 회관을 매일 순회하며 공손히 절을 올리는 일 등 정치인의 배우자로서의 삶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꼭 실력 있는 사람이 당선되는 것은 아니라며, 늘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그때부터 오롯이 몸에 새겨진 습관은 근작시에도 생생히 드러나 있다. (p. 시 156-157/ 론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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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2-8월(382)호 <커버스토리>에서

  * 최금녀/ 1998년『문예운동』으로 등단, 시집 『저 분홍빛 손들』『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등

  * 박민혁/ 시인, 2017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