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라는 이상한 카멜레온이 되다 외 1편
이은수
초겨울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분해되고 있을 때
순간 무채색으로 아득해지는 시간
시간의 분자들이 내 몸에
마구마구 쏟아져
머리가 간질간질 내 몸에
버즘나무처럼 수피가 변해가고 있어
머리카락, 눈썹, 몸털이
검은 윤기를 잃고 하얗게 말라가며
먼지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어
기억과 마음도 허연 버짐으로 번져 가며
바람 한 번에 훌훌 흩어지고
목소리에도 흰 공백이 넓어져
채 씹히지 않은 말들이 허공처럼 걸림이 없고
나이가 든다는 건,
보호색인 하얀색을 띠는 걸까
물처럼, 공기처럼,
점점 저항값이 작아지고 흐름을 따라 흘러가게 돼
비늘로 덮여진 눈은 자연으로 스며들어
그림자처럼 순해지고 희미해지게 되는 거야
뜨거운 사랑을 움켜쥐었던 욕망도
고운 흰색으로 채색되어 남기는 거지
-전문 (p.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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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를 걸다
시간이 내리막길 같아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했어
한껏 부정이 팽창된 시간이었어
이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홀가분하다고
자유롭게 마음을 놓아 주었다며 좋아했지
익숙함은 태만으로 시간을 너덜거리게 해
중력은 꼬리가 달려 있어 기억을 쉽게 잃어버렸지
메시지 한 줄에,
그 많던 초침과 시침과 달력의 날짜들이
재빠르게 되돌아오면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어
한나절은 족히 지난 말이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어
생의 바깥에서 안을 속살거리고
멈춰 있다는 건 착각
나비의 푸른 지문들이 손끝에서 흐르고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여
아, 이렇게도 빨리
어긋난 운명이 되었지
잠깐씩 흐려졌다 밝아진 틈을 톺아보니**
울컥,
첫 마음에 링크를 걸어준 거야
-전문 (p. 38-39)
* 정보 통신 두 개의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일.
** 몸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는다는 순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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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링크를 걸다』에서/ 2022. 8. 10. <미네르바> 펴냄
* 이은수/ 서울 출생, 2011년『아동문예』로 동시 부문 당선, 2021년 『미네르바』로 시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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