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서체 외 1편
최영희
묵정밭에 호미로 글자를 새긴다
주름진 손끝마다
들숨과 날숨처럼 꿈틀대는 연두
묵은 땅 일궈 연두를 끌어내는 동안
새싹을 피워내는 조심스러운 몸짓
오월의 봄을 수식하는 햇살서체
일손을 멈추고 초록에 잠기는데
섬세하게 깃든 정성마다
서서히 살아나는 숨결
초서체를 가꾸는 이랑에
봄바람 살랑대는 초록빛 흘림체
파는 정자로 또박또박 자라고
무는 삐침이 있으면서
풍성한 맵시를 수식한다
파릇하게 돋아나는 밭의 문장
호미로 긋는 예서체로
옥수수 모종을 심어 빈 고랑을 쓴다
묵정밭에 푸른 편지 써 내려가는 어머니
연둣빛 서간문이 차곡차곡 쌓인다
-전문 (p.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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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고 있습니다
주문을 받으면 신속하게 배달하는 바람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든 전해주는 택배회사
바람의 속도에 따라 택배비가 다르고
태풍이 불면 위험수당이 붙는다
때로 변덕을 부리는 교통상황
가야 할 방향을 예측할 수 없어
흔들리는 나뭇잎에도 포장을 자주 확인한다
안전하게 전달하려고 날씨를 잘 읽는다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와
천둥 번개 치며 쏟아지는 소낙비
익숙한 하늘길이 막힐 때 기상 정보는 일급비밀
고객 만족이 제일
부재중이거나 주소가 맞지 않으면
다음 날 다시 배달한다
비바람과 분쟁에 휘말리면 피해 보상 때문에 휘청
매출은 계속 이어진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여서
미세한 바람도 택배원으로 쓴다
-전문 (p. 72-73)
* 시집 『멈춘 자리에 꽃이 핀다』에서/ 2022. 8. 25. <상상인> 펴냄
* 최영희/ 전북 대야 출생, 2009년『수필춘추』로 수필 부문 등단, 2021년『계간문예』로 시 부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아마추어사진작가협회> 회원, 단체사진전 20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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