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
배한봉
닳은 구두 뒤축을 갈기 위해
구둣방에 갔는데, 늙은 수선공이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심어놓았다.
걸음 걸을 때마다
사과꽃 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음산 옆구리의 골짜기가 고향이라던 늙은 수선공은
4월이 되면 늑골 깊은 곳에서 사과꽃이 핀다고 했다.
그러니까 늑골 깊은 곳은,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 옛집 마당.
늙은 수선공은, 이 도시 거리를
천진한 웃음이 사과꽃 향기로 퍼지는 마당으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구두에 심어놓는 불가해한 기술을 보여줄 리 없다.
그런데 내가 거리를 걷는 동안
아무도 사과꽃 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만개한 사과꽃 향기를 느끼지도 못했다,
얼른 집에 돌아와 보여주었지만, 아내도
구두에 뒤축 대신 사과나무가 심겨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늙은 수선공의 불가해한 기술보다
더 감쪽같은 이 도시의 변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내 구두에 사과나무를 심던
늙은 수선공의 이마에서 촉촉하게 굴러 내리던
나뭇잎 위의 이슬 같던 그 맑은 땀방울을.
그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가슴속의 성전을 수선했던 것이다.
기억의 꼬리를 잡고
돌담집과 뒷골목과 대밭을 순식간에 돌아 나오는 늙은 수선공을
천 개의 눈을 켜고 바라보던 사과나무,
지금도 걸음 걸을 때마다 내 구두에서는
왈칵, 왈칵 피는 사과꽃 소리 들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중 하나가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이다. 그 아름다움은 감각 세계에서는 거짓처럼 보이는 사건에서 비롯한다. 늙은 수선공은 뒷굽 자리에 굽 대신 사과나무를 끼워 놓았다. 다른 이들이 구두의 사과나무를 눈치챈다면 그는 생계의 방편을 들킨 마법사 같은 사람이겠지만 오직 수선공만 느낀다면 그는 같은 시간에 다른 세계를 사는 이일 것이다. 우리는 그를 뮤즈라고 말하고 그의 말을 받아 적는 이를 시인이라 부른다. 수선공은 고향을 기억하고 있으나 기억 속의 고향은 너무 많이 변해 버려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는 사과꽃의 향기를 이 세계에 퍼뜨리려 한다. 역방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보이는 마당의 기운을 모아 저 세계의 향기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 세계의 향기를 모아 이 세계의 마당에 흩뜨리는 것이 그의 임무이다.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고양이 그의 목적인 것이다. (p 시 19-21/ 론 140-141) (김종훈/ 고려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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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육탁』에서/ 2022. 1. 10. <여우난골> 펴냄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주남지의 새들』『복사꽃 아래 천년』(소월시문학상 수상),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악기점』『우포늪 왁새』『黑鳥』, 시「우포늪 왁새」(고등학교 교과서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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