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를 지켜보는 나/ 휘민

검지 정숙자 2022. 8. 10. 01:33

 

    나를 지켜보는 나

 

    휘민

 

 

  1

 

  평일 아침에 나는 목이 길고 점잖은 초식동물 앞에 서 있다

  <그물무늬기린 멸종 취약종>이라는 안내문을 읽으며

 

  아이는 가늘고 긴 다리로

  붉은 춤사위를 시작하는 플라밍고들을 바라보며

  외발서기를 반복한다

 

  홀린 듯이

 

  당신은 시작을 말했지만 끝을 말하지 않는 사람

  나는 대답 없는 당신의 손끝을 어둠 속에서 응시하는 사람

 

  어는점과 녹는점이 같은 온도라면

  0도로 낮아진 마음은

  액체와 고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것일까

 

  한때 나를 정지시켰던 편파적인 시간과

  비등점을 향해 들끓던 우리의 미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도 진심이 잡히지 않는다면 나는 화자이길 포기해야 할까 사육사의 신호에 맞춰 이동하는 저 새들은 왜 그물도 없는 하늘을 훨훨 날아가지 못할까

 

 

  2

 

  아이가 다가가자 공작이 갑자기 깃털을 펼친다

  미러볼처럼 반짝이는 아르고스의 눈  

 

  깜짝 놀란 아이가 외친다

  엄마, 깃털부엉장이에요! 깃털부엉장!

 

  미처 새의 이름을 알려주기도 전에 아이는

  이제껏 내본 적 없는 가장 큰 목소리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어쩌면 공작은 깃털이 풍성한 부엉이여도 좋을 것이다 앙증맞은 목소리로 촐싹대는 피콕이어도 좋을 것이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랑이 지운 시간은 언젠가 권태라는 이름으로 복기될 테니

 

  저 새는 나를 위협하는 것일까 유혹하는 것일까

 

  홀로그램 위에 펼쳐진 백 개의 눈동자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나들이 있다

    -전문 (p. 23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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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emPeople시인들』 2022-여름(창간)호 <신작시> 에서

   * 휘민/ 2001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등단, 시집『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생일 꽃바구니』, 동화집『할머니는 축구 선수』, 동시집『기린을 만났어』, 그림책『빨간 모자의 숲』『라 벨라 치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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