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사
정숙자
셰퍼드 세인트버나드 러시안 허스키, 풍란 사란 춘란, 부모님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 스승, 사랑과 우정, 그들 모두 진심을 채워 기울여 봤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달아나거나 죽거나 시들었다. 오로지 변함없는 대상은… 책뿐이었다.
책은 최소한 백 년은 신의를 지킬 것 같다. 스스로 구기거나 불타거나 찢지 않고, 썩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기본적인 장소에 놔두기만 해도 그들은 토씨 하나, 따옴표 하나 버리지 않고 종이가 삭을지언정 뼈대를 바꾸지 않는다.
진시황처럼 뭔가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 나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아니라 병서용갱兵書俑坑을 지으리라. 읽은 책과 읽어야 할 책, 영혼의 나비이며 산맥이며 길이며 공기이며 태양인 책들을… 허무사 실행하는 내 마지막 날에
내가 만일 내일 아침 주검으로 발견된다면
그는 분명코 허무사虛無死가 될 것이리라
-전문, 『시로 여는 세상』, 2021-봄호
▶ '같이'의 가치(발췌) _박수빈/ 시인, 문학평론가
지긋한 나이가 되어 인생을 돌아봤을 때 크게 두 가지의 아쉬움이 있겠다. 먼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을 경우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저지른 후회이다. 이런저런 생각들 속에 결국 남는 게 무엇인가 싶고 사는 게 허무해지기도 한다. 후회가 적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달아나거나 죽거나 시들"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화자는 "책뿐"이라고 말한다.
도입부에서 언급하듯 진심으로 대해도 그 대상들과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 아끼던 동물, 식물, 주변인들도 시절 인연이고 이해타산에 따라 만나고 흩어지기 일쑤이다. 사랑과 우정 사이며 사제지간師弟之間 역시 인지상정을 따른다. 나와 핏줄을 나눈 부모며 형제자매도 태어나는 순서 있으나 하늘 여행 떠나는 순서는 따로 없는 게 목숨이다.
노화가 되면서 일상생활이며 가족과의 관계에도 심리적으로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끼기 쉽다. 노인은 젊은 사람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가족이나 지인이 죽을 때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상실은 적응하기 힘든 일이다. 사별하면 죽음이 현실화가 되면서 허망해지기도 한다.
이 시는 미리 써놓은 유서나 묘비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진시황처럼 뭔가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이라거나, "내가 만일 내일 아침 주검으로 발견된다면"의 가정법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낀다.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 의미 있는 생을 살고자 화자는 "병서용갱兵書俑坑"을 택한다. 무덤 속에 책을 가지고 가고 싶다는 것인데 책은 "영혼의 나비이며 산맥이며 길이며 공기이며 태양"으로써 허무한 인생을 유의미하게 하는 연유이다. 죽어서도 책을 같이 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 zum Tode)'로 본다. 죽음으로 향하는 한정된 인생을 의미 있는 기투企投로 채워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시인 역시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며 글에 임하는 자세가 돋보인다.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실존의 존재 방식에 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존과 허무감과 나아가 죽음의식으로 연결된다. (p. 시 91-92/ 론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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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學 史學 哲學』 2021-여름(제65)호 <지난 계절의 시평>에서
* 박수빈/ 시인, 평론가, 『열린시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청동울음』『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스프링시학』『다양성의 시』, 연구서『반복과 변주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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