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일곱 살과 일흔 한 살/ 윤제림

검지 정숙자 2020. 5. 31. 02:52

 

 

    일곱 살과 일흔한 살

    - 추사약전秋史略傳

 

    윤제림

 

 

  봄이 저 혼자 일어서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입춘날,

  어느 집 대문에 봄을 환영하는 글 한쪽 나붙었는데요.

 

  입춘대길, 좋은 일 많이 생기고

  하늘땅 두루 태평하시라는 말씀

  행인들마다 고맙고 놀라운 얼굴로

  한마디씩 하고 가더래요.

  "일곱 살짜리가!"

  출근길 채제공 대감도 덕담을 했다지요.

  "크게 될 아이로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봄이 물결처럼

  흘렀을까요.

  일곱 살짜리도 칠십이 넘어

  한강변 어느 큰 절이 집 한 채 새로 짓고

  글씨를 청하기애 써 주었다지요.

  '판전'板殿.

 

  추사 글씨라는데 그냥 지날 사람 있겠어요.

  "아픈 몸으로 썼다는군."

  "마지막 작품이라지."

  "에이, 일곱 살짜리 글씨 같은데, 뭐."

 

  제 생각은요, 편액 뒤쪽에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의 멀미를 견뎌야 할지 모를

  아득한 약속이 적혀 있을 것만 같아요.

 

  "저녁 어스름 집으로 돌아가는 여린 마음이라서

  일곱 살 기력 붓 끝에 겨우 모아

  바삐 썼으니, 언젠가 다시 와서

  새로 써드리리다.

  당분간 그냥 걸어놓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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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창작』 2020-여름호 <중견 시인 24인/ 신작시> 에서

  * 윤제림/ 198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새의 얼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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