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성
조정권(1949-2017, 68세)
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쓰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뿌리들이 여지껏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 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몸뚱이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우리만큼 흙의 혈血을 물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 흙의 육肉을 물어뜯고 있었나 보다
이놈들은 흙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제 하반신을 스스로 잘라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육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전문-
▶ 견인의 탐미주의, 그 결빙의 여정(발췌)_ 이숭원/ 문학평론가
이 시는 존재의 문제를 성찰한다. 밭에서 배추를 뽑으면 뿌리에 흙이 묻어 나온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실을 시인은 점착력 있게 파고든다. 배추의 뿌리와 흙의 관계에 천착한다. 모든 식물의 뿌리는 흙으로 파고든다. 흙의 어느 부분까지 파고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배추를 뽑아 보면 뽑힐 때 저항감이 있다. 뿌리가 흙 속 여기저기 파고들어 흙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뿌리의 혈과 육이 흙의 혈과 육과 내통하여 밀착의 공생을 이루고 있다고 상상한다. 뽑힌 뿌리에 언제나 남아 있는 흙의 잔해를 흙의 혈과 육이라고 생각한다. 배추가 뽑힌 자리에는 흙 속에 뿌리의 혈과 육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배추의 뿌리와 흙은 생명과 힘의 관계로 얽혀 있다. 날아가던 새를 보던 시인의 눈은 이제 존재의 문제를 넘어 생명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모든 사물은 진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연줄로 얽혀 있고 그 어느 하나가 분리될 때 얽혀 있던 것의 혈과 육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생명의 혈연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p. 35(시)/p. 35-36(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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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스프리』2019-가을호 <작가조명_ 시인 조정권> 에서
* 이숭원/ 1986년『한국문학』으로 등단, 저서『몰입의 잔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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