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고 닳도록
박판식/ 2014, 김춘수시문학상 수상자
마르고 닳도록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요? 4시간째 이불장에 숨어 있다가
아무도 찾지 않자 작은 아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마음을 보는 카드놀이, 초록 외계인이 광선 칼을 맞고 나는 흰 아기 코끼리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입으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죽은 나를 뒤집고 또 뒤집습니다
지옥에서 불과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 이 세상이 있습니다
다리가 쌓이고 팔이 쌓이고 가면 같은 얼굴이 쌓이고
그리움이 쌓이고 거듭 거듭 가을이 가고 불면이 쌓이면서
불안한 몸을 뒤척이면
딸은, 아빠는 피곤해 피곤해라고 외치며 의자 위에서 말발굽 소리를 냅니다
내 꿈의 사계가 도면처럼 펼쳐지면
그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발견할까요
끝없이 열린 길, 언젠가 나는 사랑스런 내 딸을 나의 고향이라고 부르겠지요
만세, 만세, 만세 나는 영혼을 아주 싼 값에 팔았습니다
나는 못된 남편이고 호통치는 아빠였습니다
오늘만은 나도 어린아이가 되어
머릿속을 몽롱하게 떠다니는 아내의 고민과 걱정을 씻어주고 싶습니다
저기, 프라이드치킨과 청량음료수를 기다리며
새끼 곰들처럼 비쩍 마른 굴참나무 가지에 식구들이 하나씩 매달려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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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2019. 9. 20. <도서출판 경남> 펴냄
* 박판식/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2001년『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밤의 피치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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