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당신의 새장/ 유미애

검지 정숙자 2019. 9. 10. 23:32

 

 

    당신의 새장

     - 새 뼈로 만든 피리

 

     유미애

 

 

  이것은 새의 다리에서 길어 온 마지막 이야기

  조개무지 아래로 이곳의 빛과 계절을 흘려보내요

  새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내 앙상한 종아리로 당신의 숨결이 옮겨 올 때까지

  금 간 악기에 난 구멍은 우리들의 눈과 입술

  뱀처럼 앉아, 낮과 밤의 피가 섞이던 순간을 떠올려봐요

  조개껍데기만 한 한 뼘의 하늘이 우리의 전부지만

  당신의 손자국을 따라 흰곰이 깨어나고

  검은 말들이 골목을 달려요

  오래 앓은 나는 서리 맞은 뼛조각을 이으며 뭉클뭉클

  눈물을 모아요

  열세 조각의 반란, 빙하를 녹이는 울음소리에

  난로 위의 봄이 끓어오르고 주저앉은 시간이 일어서요

 

  이것은 아픈 다리들이 부르는 최초의 노래

 

  약봉지를 비우면 다시 뭉클 깊어져요

  발코니에 남겨진 당신의 새장

    -전문-

 

 

  해설> 한 문장: 위 시에는 "새 뼈로 만든 피리"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는 3만 5천 년 전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새의 뼈로 만든 피리이다. 화자의 거주지 발코니에는 "새장"이 남겨져 있다. 여기에서 남겨진 "새장"은 곧 "새"의 부재를 암시한다. 추측건대 이 시는 "새"의 부재와 "새 뼈로 만든 피리"라는 두 모티프가 결합되어 시작되었을 듯하다. 고대인들은 새의 다리뼈로 피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금 간 악기에 난 구멍"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가 목격한 피리에는 금이 간 상태이고, "뱀처럼 앉아"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누군가가 주저앉아 피리를 연주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피리를 부는 행위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피리를 연주함으로써 "흰곰이 깨어나고/ 검은 말들이 골목을 달"린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을 모으니, "피리"에는 "난로 위의 봄이 끓어오르고 주저앉은 시간"을 일어서게 만드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 여기에서 '피리'로 대표되는 예술이 "난로 위의 봄"과 "주저앉은 시간"을 일어서게 만든다는 것, 즉 상승의 이미지에 주목하자.(p.111-112.) (고봉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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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분홍 당나귀』에서/ 2019. 8. 9. <천년의시작> 펴냄

  * 유미애/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손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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