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조대한_자선친필시고/ 또 다른 고향(故鄕) : 윤동주

검지 정숙자 2018. 5. 21. 01:13

   

 

     또 다른 고향故鄕

 

     윤동주(1917-1945, 28세)

 

 

  고향故鄕에 돌아온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고향故鄕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오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 전문, 1941. 9.

 

 

   동어반복적 고향_ 조대한

   이 시편은 '고향'에 돌아온 것으로 시작해서 '또 다른 고향'에 가려는 것으로 끝난다. 윤동주의 고향은 어디일까. 물론 그의 생물적 고향은 북간도의 명동촌이겠지만, 고향이라는 장소가 부유하는 인간의 정서적 뿌리이자 정신적 지향임을 감안했을 때 생물적 고향과 정서적 고향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현재의 중국 지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몇몇의 학교를 다니고 일본에서 사망한 윤동주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상기해보면, 해당 시편의 고향과 또 다른 고향이 어떤 구체적 지역을 가리킨다고 확안하기는 쉽지 않다.

  작품 내적으로 양쪽은 꽤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고향은 백골과 함께 눕는 곳이고 또 다른 고향은 백골 몰래 가야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만수는 [윤동주 「또 다른 고향」의 구조분석]이라는 글에서 백골을 수식하는 '곱다'와 또 다른 고향 및 혼을 수식하는 '아름답다'를 대조한다. '곱다'는 '고운 가루'나 '곱게 늙었다'와 같이 물질적 · 시간적 한계 속에 있는 실체를 수식하며, '아름답다'는 진선미의 '미'처럼 불변하는 가치나 정신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시집 전체로 보았을 때 이 같은 대비는 제법 설득력이 있다. 가령 「서시」에 등장하는 '바람'이 유한한 존재의 실존적 괴로움이라면, '별'은 영원한 아름다움이자 이상으로 읽힌다.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이 시간에 마모되어 가는 대상이라면, 아름다운 혼은 하늘의 별처럼 변치 않는 무엇이다. 간단히 도식화하자면 한쪽엔 고향, 백골, 고움, 방, 바람, 어둠 등이 있고 다른 한쪽엔 또 다른 고향, 혼, 아름다움, 우주 등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도식화가 해당 시편을 온전히 해독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은 '개'이다. 어둠을 향해 짖는다는 점에서, 개는 아름다운 곳으로 나를 인도하는 존재인 듯하다. 그런데 왜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가야만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개라는 외부적 인지 없이는 혼자 구분해내지 못할 정도로, '백골'과 '혼'이 내 존재 속에 밀접하게 중첩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 '곱다'와 '아름답다'는 차이보다 더 큰 유사함을 전제하고 있다. '곱다'의 사전적 정의는 '산뜻하고 아름답다'이며, '아름답다'의 정의는 '예쁘고 곱다'이다. 사소한 시어에 민감한 윤동주가 거의 동어반복과도 같은 두 형용사를 각기 백골과 혼을 수식하는 데 사용한 까닭은, 양쪽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백골과 혼이 미세한 차이도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포개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는 아닐까. 그렇기에 사그라져가는 백골을 바라보는 시인의 슬픈 눈물은 나의 울음인지, 백골의 울음인지, 아름다운 혼의 울음인지 쉽게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인의 존재 속에 동어반복처럼 각인된 균열이자 중첩이기에 쉬이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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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2018-여름호 <기획연재_ 윤동주 시인 > 에서

  * 조대한/ 한양대학교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