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분서(焚書)/ 정원숙

검지 정숙자 2017. 1. 24. 11:45

 

 

    분서(焚書)

 

    정원숙

 

 

  의심이 점점 늘어간다. 책장을 정리해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

억도 나지 않는 줄거리. 감정도 먼 흑백사진 몇 장. 그들은 죽어 여기 없

고 오늘의 눈동자는 살아서 그들의 사진을 본다. 창밖으로 매미 껍질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진다. 매미도 한 시절을 불살랐을 것이다. 그들의 웃

을, 사진을, 기억도 희미한 페이지를 불사르기로 한다. 의심들을 불사

르기로 한다. 불을 당기자, 기억나지 않는 상징 속에서 수런수런 말소리

들려온다. 의심이 점점 늘어간다. 불타오르면서도 의심은 멈추지 않고

재로 쌓인다. 오로지 순간에만 집중하자. 불타오르는 순간만은 완전하

다.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불타오르는 순간만은 순수하다. 하나의 실

재가 될 때까지. 책을 불사른다. 이데아를 불사른다. 죽은 저자들의 사

회를 불사른다. 영원히 죽지 않을 작자들의 난무하는 상상력, 죽은 광기

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불타오르는 순간은 완성된다. 하나의 철

학이 될 때까지. 불타오르는 순간은 순정하다. 하나의 정치가 될 때까

지. 아직도 할 말이 많은 입술들을 불사른다.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역

사들을 불사른다. 의심은 영영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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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POEM ④ 2017에서/ 2017.1.10. <한국문연>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