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트리
이현채
레드와인이 창밖을 응시는 토요일 오후입니다. 한 물방울인 내가 강
물인 나에게로 흘러내립니다.
나는 단 하나의 이파리입니다. 길 잃은 새입니다. 허공을 때리는 북
소리가 들려옵니다.
몰락과 소멸의 저녁놀이 떠오릅니다. 오래된 책에서 생각의 냄새를 맡
습니다. 초록 마차를 타고 다니는 머릿속은 늘 두꺼운 구름이 가시지 않
고 죽음의 아름다움에 젖습니다. 깃발을 펄럭이며 강물로 흘러내립니다.
누더기로 기운 레몬트리의 앙상한 가지들 속에서 우드득,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고개 숙인 바람이 내 앞을 걸어갑니다.
바람을 닮은 새는 다른 새들의 사투리를 배우려고 지독한 수다쟁이
가 되기도 하지만 곧 침묵의 순교자가 됩니다.
자격증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 창밖으로 뛰어
내리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우주는 회상록이고 지구는 일기장입니다. 풀잎조차도 자서전을 씁니
다. 방황하는 새는 방부제 가득한 꽃들의 수다를 듣습니다.
보이는 것은 노란 레몬트리뿐입니다. 위로 보아도 아래로 보아도
노랑뿐이야 - 순간이 영원의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목한 밤입니다.
-『현대시』,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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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허무를 듣는 레몬트리의 밤(발췌) : 최서진
막다른 골목이다. 화자의 삶에 어떤 흉터로 기록된 세계. "우주는 회상록"이다. 고독한 시간을 뒤돌아보며 아픈 별을 바라본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회의로 인해 "방황하는 새"가 된다. "보이는 것은 노란 레몬트리뿐"인 곳. "순간이 영원의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목한 밤"의 일이다. 오목한 밤은 시인의 아주 특별한 시간이며 지점이다. '레몬트리'의 이미지는 사물화 된 대상으로 존재하면서 시인의 자아 분열적인 내면을 투사시키고 있다. 다시 시적 공간 안으로 들어가 「레몬트리」의 가사를 음미해보자. 시인은 휴일 저녁 현실의 긴장을 내려놓고 와인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있다. "쉬고 싶고 자고 싶고 오래된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강물처럼 흐르는 휴일 저녁이다. 그러나 시인 곁에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허공에 달이 웃고 있을 때 "꿈에 숨겨온 노란 빛깔(lemon tree)를 꺼낸다. 「레몬트리」는 끊임없이 내달려야 하는 삶 속에서 시인이 찾은 음악이라는 색깔의 지혜이기도 하다. 시인은 꿈을 꾼다. 꿈(레몬트리)이 있는 한 고통스럽기만 한 현실 세계에서도 가치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현채의 시에는 '순간'이 만들어 내려놓은 한 그루 그늘이 있다. 불현듯 그 그늘을 바라보는 시인은 절망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우주에서 지구로, 다시 지구 안에 작은 풀잎으로 '자신'의 흔적을 기록할 뿐이다. 때로는 '방황하는 새'의 형국으로나마 묵묵히 비상하는 존재로 남겠다는 것이다. 「레몬트리」는 시인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깊고 쓸쓸한 그늘 같은 울림을 견인한다. ▩
*『현대시』2016-3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에서
* 이현채/ 2008년 『창작21』로 등단
* 최서진/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문학박사, 한양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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