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피곤한 소녀 외 1편/ 최수진

검지 정숙자 2023. 10. 24. 01:52

 

    피곤한 소녀 외 1편

 

     최수진

 

 

  잿빛 시멘트를 개어 불우한 눈두덩이 위에 켜켜이 발랐다

  심드렁한 오후와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과 모래들

 

  눈가가 굳어가기 시작할 즈음 나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면 한낮은 더욱 피곤해지는 법

  싹이 돋아난 고독한 눈동자들

 

  더욱더 나를 달궈주세요

  어느 특급 호텔의 주방장이 나의 영면을 요리하는지

  눈이 당기고 조이는 통에 도리어 나는 사경을 헤맸다

 

  다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산수유 열매가 울긋불긋 각막 위로 만개했고

  간질간질하면서 꼭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은 게

  오랫동안 잠을 잃은 자리에 부스럼이 채워지는 모양이다

 

  그 순간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자들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영원 따위는 스러져가길, 잔인한 저주를 퍼부으며

  굳게 닫힌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전문(p. 90-91)

 

 

    ---------------------------

    Mrs. 함무라비

 

 

  투박한 부리로 갯바위를 쩡쩡 쪼고 있노라

  무두질하여 갓 펴낸 연질의 거죽 그 위에

  짐은 무아지경으로 낙서를 휘갈기노라

  시라는 88개의 건반을 격렬하게 두드리노니

  뿌리가 억센 파피루스에도 태양이 움트는도다

 

  제우스의 상형문자

  절대적인 힘을 갖는 그것 아래에서

  그대들은 무릎을 꿇고 복종하라

  짐은 너희의 지배자이니라

  혹독하고 관능적인 형상으로 두 눈을 멀게 하나니

  감각이 아득해질수록 의식은 더운 또렷해지리라

 

  이로써 나의 제국을 건설하였음을 선포하노라

  축배를 들라!

  배반한다면, 도덕의 잣대로 너희를 심판하리니

  부디 만물을 직관하라

  한결 누그러진 닥종이에 주옥같은 판결을 하나니

  고개 숙인 그대들의 죄악을 낱낱이 헤쳐 읊으리라

 

  짐의 명명백백한 이름으로 이를 후세에 남기노니

  민초들이여,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도 같이 여겨

  짐의 수고를 두고두고 곱씹어보길 바라노라

 

  그리하여 대륙 아티카의 밤은 더욱 깊어지리라

     -전문(p. 52-53)

 

   --------------------------

  * 시집 『Mrs. 함무라비』에서/ 2023. 9. 22. <소금북> 펴냄

  * 최수진/ 1988년 강원 춘천 출생, 2021년『시와소금』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산채비빔밥과 몽키바나나』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사론(論) 외 1편/ 박미라  (0) 2023.10.25
풍찬노숙/ 박미라  (0) 2023.10.25
서투른 어른/ 최수진  (1) 2023.10.24
시인 외 1편/ 김남호  (0) 2023.10.21
북천/ 김남호  (0) 202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