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어른
최수진
봄기운 물씬 담아내려 찾은 남이섬
한낮에는 따끈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팔짱을 끼고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습니다
영화화면 속 두 개의 그림자가 만든
떨림을 재연해봅니다
꽃비가 흩날립니다
우리는 열심히 페달을 밟습니다
산들바람이 젖은 이마를 식혀줍니다
네 발과 네 개의 바퀴가 정체된 시간을 굴립니다
참새, 오리, 공작, 타조들이
손님맞이에 분주합니다
방목되어 자유스러운 그들은 누구에게나 친절합니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 지나간 뒷자리가 점차 흐트러집니다
젖먹이 아가의 배시시 웃음도
덩달아 벙글어집니다
달콤한 유희 후에 즐기는 커피 한 잔
오늘의 추억이 담긴 흑백 필름을 되돌려봅니다
나는 자작나무 숲속의 하얀 요정이 되었습니다
싱그러운 향기를 가득 훔친
내 마음이 오래도록 떨립니다
강바람이 밀어주는 유람선을 끝으로
겨우 어른이 된 내가 소풍을 마쳤습니다
나는 이제 막 세상을 향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소소한 풍경은 이제
노련하고 정제되고 고상하게
한 발짝 더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제 서투른 어른입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지금 이 순간, 시인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굳이 현재일 필요도 없고 미래일 필요도 없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의 시간만이 오직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참새, 오리, 공작, 타조' 등등의 조류와의 눈맞춤과 사진 찍으며 찰칵이는 소리, 젖먹이 아기의 웃음조차 시공간을 뛰어넘는 중이다. 풍경에 압도당했는가 하면 어느 사이 '자작나무 숲속의 하얀 요정'이 되어버리고 만다. 시공을 초월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기어이 보고야 만다. '겨우 어른'이 된 나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진작 어른이 된 줄 알았는데 '남이섬'이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알았다. 그 시간, 그 풍경이 내어주는 곳에서 마주한 '서투른 어른'을. 자아 반성은 이렇듯 힘이 세서 여전히 성장 중인 여린 등을 힘껏 밀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p. 시 18-19/ 론 135) (박해림/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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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Mrs. 함무라비』에서/ 2023. 9. 22. <소금북> 펴냄
* 최수진/ 1988년 강원 춘천 출생, 2021년『시와소금』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산채비빔밥과 몽키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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