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추장 이야기/ 서안나

검지 정숙자 2023. 8. 2. 12:50

 

    고추장 이야기

 

    서안나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대여섯 살 때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기억이라곤 자부동(방석)을 머리에 이고 총알을 피해 거리를 뛰어다녔던 기억만 난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해방이 되자 자식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일본에서 힘들게 번 돈을 보자기에 둘둘 말아 허리춤 깊숙이 숨기고. 하지만 배에서 큰돈을 도둑맞았다.

 

  고향에 도착해 보니 일본에서 힘들게 벌어 보낸 돈도 친척의 농간으로 받지 못했다고 했다. 다행히 외증조모가 숨겨두었던 돈으로 제주 안덕면에 땅르 마련하여 농사를 짓고 닭도 키우셨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4.3으로 마을 근처로 피난 온 외갓집에 가는 날 나의 어머니도 함께 가셨는데. 4.3 시절이라 오랜만에 본 딸의 밥상도 보리밥과 소금과 간장이 전부였다는데.

 

  그중 어머니의 눈길을 끄는 것이 고추장 단지였다. 투박한 작은 옹기에 담겨 밥상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고추장을 생전 처음 접한 터라 밥 한 수저에 고추장 한 숟가락씩 정신없이 먹었다고 한다. 처음 먹어보는 고추장이 참 달았다고 했다.

 

  외증조부는 4.3 때 아들을 잃으신 분이다. 겨우 스물이 지난 다섯째 아들이 산사람에게 정미소 기름을 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경찰 총에 맞아 흙구덩이에 버려지고 외증조부가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외증조부는 자식 앞세우고 고기반찬이며 입에 단 음식을 멀리 하셨다. 고추장이 유일하게 입맛 돋우는 반찬이셨다는데. 자식 먼저 보낸 죄가 크다고 겨울에도 냉골에 주무셨다고 한다.

 

  4월이 되면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그 서러운 밥상이 떠올라 가슴 아파하신다. 피 냄새나던 외할아버지의 붉은 고추장이 아직도 입안을 얼얼하게 한다는데.

   -전문(p.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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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3-여름(90)호 <신작시> 에서

  * 서안나/ 1990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정의홍선집 1· 2』, 동시집『엄마는 외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