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 (1 : 46)
이기성
푸른 언덕 아래 공장은 거대한 귀를 가졌네. 검은 굴뚝 무거운 구름을 컥컥 뱉어낼 때 누런 황금의 해는 떠오르고, 아침마다 아비의 빈 구두에서 나팔소리는 들렸네. 허물어진 담벼락에 집 짓는 늙은 거미처럼 사내들 줄지어 언덕을 내려와 공장의 입구로 들어가고, 새들은 웅덩이 닿을 듯 날아가네. 먹구름 뭉글뭉글 굴뚝 안에서는 무엇이 태워지고 있나. 흔들리는 육교 나팔의 꽃은 삐꺽거리는 목발을 칭칭 감고 피어올랐네.
검은 산처럼 쌓인 구두 갑자기 해는 떨어지고 잿빛 하늘 한 조각이 툭 끊어지네. 낡은 구두 한 짝을 물고 어린 새들 굴뚝 밑으로 돌아오는 저녁. 벌겋게 녹슨 아비의 얼굴에서 뜨거운 촛농은 흘러내렸네. 거미들 소란을 뚝 그치고 새들은 고개를 파묻고 창백한 아이들은 더듬더듬 숨을 곳을 찾네. 웅덩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세상의 모든 귀는 촛농으로 단단하게 봉인이 되어 있는데 청동의 나팔소리 검은 구름이 후루룩 삼키네.
-전문-
▶ 시-공간의 구멍과 봉인, 고독과 열정 사이/ 이기성 시의 감응적 메커니즘과 지향성(발췌) _오형엽/ 문학평론가
언어의 음운적 유사성에 근거하는 유추가 "아비의 빈 구두"에서 들리는 "나팔소리"에서 "흔들리는 육교 나팔의 꽃"으로 전이된 후 "청동의 나팔소리"로 회귀하는 양상은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를 왕복하면서 '수직적 몽타주"1)를 형상화한다. 앞 장에서 고찰한 첫 번째 상징 계열로서 '구멍과 열쇠'가 촉각적 감각과 청각적 감각의 결합이고 두 번째 상징 계열로서 '물과 별'이 촉각적 감각과 시각적 감각의 결합이라면, 세 번째 상징 계열로서 '나팔소리'는 시각적 감각과 청각적 감각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의 전개에서 가장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늙은 거미"와 "새"의 대비적 형상이다. "공장의 입구로 들어가"는 "사내들"을 "허물어진 담벼락에 집 짓는 늙은 거미"로 비유하는 장면과 "컴컴한 웅덩이 닿을 듯 날아가"는 "새들"의 장면을 병치하여 '충돌 몽타주'2)를 형상화함으로써 시적 주제를 갈등의 양상으로 드러낸다. 전자가 '고독'과 '비애'를 중심으로 하는 '차가운 감응'과 연관된다면, 후자는 '차가운 감응'에서 출발하여 그 수면 위로 비상飛翔함으로써 '뜨거운 감응(충동)'에 이르는 여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연동하여 "흔들리는 육교 나팔의 꽃은 삐꺽거리는 목발을 칭칭 감고 피어올랐네"라는 문장에서도 "나팔의 꽃"은 "피어"오르는 상승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p. 시 120-121/ 론 121~122)
1) 수직적몽타주는 시각적-극적-청각적 요소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단일하고 통합적인 이미지로 어우러지는 원리를 가진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수직의 몽타주 1」, 『몽타주 이론』, 이정하 편역, 영화언어, 1990, pp, 423~466 참고.
2) '충돌 몽타주'는 쇼트와 쇼트 간의 유사적 연상 관계볻 대립적 병치 관계의 갈등으로부터 시공간적 이질적 간격을 형성함으로써 충격적 효과를 이끌어내는 원리를 가진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프레임 너머에」, 『몽타주』, 홍상우 역, 경상대 출판부, 2007, pp, 524~53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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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4월(400)호 <기획연재 14/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이기성 시의 감응적 메커니즘과 지향성(하)> 에서
* 오형엽/ 1994년『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비평집『신체와 문체』『주름과 기억』『환상과 실재』『알레고리와 숭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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