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이 확실하게 웃으며
박성현
한 노인이 손가락질하면서,
당신처럼 표정이 아예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다른 노인들도 흘겨보면서 흉물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머리에서 얼굴을 도려낸 사람처럼 단숨에 무너져버린,
어쩌면 얼굴이었을 자리를 샅샅이 뒤적였다
내 손에 남겨진 굴곡은 여전히 깊고 단순한데 그들은 왜 내게 얼굴이 없다고 말했을까
가만 보니 아주 멀고 쓸쓸한 저녁이,
고대 양피지처럼 해독할 수 없는 문자들이 얼굴을 파고들어 식물처럼 뿌리를 내린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저녁과 양피지 사이를 전념하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축축한 눈구멍을 열고 노인들이 나왔다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웃으며 내 앞을 지나갔다
- 『시와정신』 2022-겨울호, 전문
▶ 세상의 바깥에서 달이 뜨고 별이 지듯_시인의 운명과 시의 숙명(발췌)_ 김재홍/ 시인 · 문학평론가
이 시의 화자는 노인들로부터 '표정이 아예 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당하고 있다. 다른 노인들도 '흉물스럽다는 듯' 혀를 찬다. 억울하다. "내 손에 남겨진 굴곡은 여전히 깊고 단순한데 노인들은 왜 내게 얼굴이 없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아마 '해독할 수 없는 문자들'이 얼굴을 파고들어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주 멀고 쓸쓸한 저녁'과 '고대 양피지' 사이를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로소 노인들이 '축축한 눈구멍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확실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표정이 있지만 표정이 없고 얼굴이 있지만 얼굴이 없는 모순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있지만, 내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감각기관의 인식체계를 무너뜨리는 어떤 공백이 이 시에 비극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해독할 수 없음'에서 '해독할 수 있음'으로 시상詩想이 전개됨으로써 결구의 대긍정이 가능해졌다. 노인들이 확실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해석 가능성의 확인에서 온다. (p. 시 112/ 론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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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詩魔』 2023-봄(15)호 <시詩 읽는 계절>에서
* 김재홍/ 2003년 ⟪중앙일보⟫로 시 부문 & 2022년 ⟪광남일보⟫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메히아』『다큐멘터리의 눈』『주름 펼치는』『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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