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essay> 中
EPISODE
조향(1917-1984, 67세)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갔다.
-전문(p. 08)
▶ 피를 흘리지 않는다(발췌)_ 이수명/ 시인
흔히 이 시가 유희적이라고 비판받는 데는 소녀의 말이 결정적 작용을 할 것이다. 총과 전쟁과 죽음이라는 비극의 무게가 전혀 담기지 않은 음성이 장난처럼 들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녀가 쓰러지지 않는다. 소녀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전쟁은 모든 것을 쓰러뜨렸는데, 총알에 의해 쓰러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쓰러지지 않는 소녀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시에 있을 리 없다. 왜 소녀가 쓰러지지 않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소녀가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안간힘을 써서 몸부림치며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총을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소녀는 상처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 시가 주는 충격은 소녀의 이 무심함에서 비롯된다. 이 극단의 무관심이 시를 이상하게 만든다. 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초현실주의가 편리하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
전쟁 중의 시가, 혹은 그 후의 시라 할지라도 현실의 피나 죽음, 고통, 상처를 내보이는 일과 거리를 둘 때 우리는 이상함을 느끼는데, 그 때문인지 소녀의 태연함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소녀의 무심함은 가볍고 섬뜩하고 기이하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 아니라, 무관함게 됨으로써 상처를 무늬로 변모시키는 현장은 문학사에서 아주 진귀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상이 죽음과 무거움밖에 없을 때에는 모두들 피를 흘리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무거움을 대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EPISODE」에 나오는 소녀가 적절하게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다만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소녀의 모습은 새롭다. 가벼움이 무거움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녀처럼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대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상처받지 않음으로 행동할 때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취소할 수 없다면 말이다. 이것이 고통을 취소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p. 10-11 (···) 11-12)
---------------------
* 『계간 파란』 2022-겨울(27)호 <권두essay>에서
* 이수명/ 1994년『작가세계』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자가 많아서 걸린다/ 김건영 (0) | 2023.05.18 |
|---|---|
| 무당거미의 진술/ 이경우 (0) | 2023.05.18 |
| 사랑하지 않는 나의 이방인/ 김이듬 (0) | 2023.05.13 |
| 아, 전쟁/ 정현종 (0) | 2023.05.13 |
| 저서(底捿)/ 이현승 (0) | 2023.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