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태선_연속성, 불연속성, 비연속성(발췌)/ 연속성 : 최세운

검지 정숙자 2023. 4. 16. 02:34

 

    연속성

 

    최세운

 

 

  저는, 비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비이커와 같이 약간의 그림지가 테이블, 테이블 위로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투명한 팔을 뻗어 어딘가에 닿아 조각조각 빛나는, 정의할 수 없는 조각들로, 땅에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흘러내리는 조각들로, 바닥면의 어딘가에서 돌고 다시 돌아서, 빛이 갈라지는 한낮을, 공휴일을, 공휴일의 어느 담장으로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동그라미 위에 가위표를 그리면서, 걸었고, 마셨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끝까지 닫히지 않는, 쇠를 돌려 잠그는, 지나간 기억에, 혼잣말을 내뱉는, 길가의 창문을 보았습니다, 순간에서 벗어난 빗물들이, 흐르다 마르고, 흘러가다 말랐습니다, 투명한 팔을 뻗어 어딘가에 닿아 조각조각 빛나는, 창문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단단하고 얇고 투명한, 정지된 어느 창가에서, 감정 없는, 얼굴이 비쳤고, 또 다른 얼굴에, 선이 그어지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창문을 마주할 때면, 여러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것이, 날아와 부딪히고, 흐르다 마르고, 순간에서 벗어난 빗물들이, 팔을 뻗어 어딘가에 닿으며, 사라졌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눈을 뜨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투명한 팔을 뻗어 어딘가에 닿아 조각조각 빛나는, 정의할 수 없는 조각들로, 땅에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비어져 있었습니다, 임박해 있었고, 물컵 속에 잠겨, 한순간으로,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전문-

 

  ▶연속성, 불연속성, 비연속성(발췌)_김태선/ 문학평론가

 「연속성」에서 우리는 '쉼표'를 통해 언어의 분절성을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한 움직임과 만나게 된다. 연속성에서 발화된 말들은 쉼표와 함께 "정의할 수 없는 조각들", "흘러내리는 조각들로" 펼쳐지는 움직임을 이행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발화자가 마주한 것들의 수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해 전하는 '나'에게서도 함께 나타난다. 즉 "저는, 흘러내리는 조각들로," 변할 뿐만 아니라 "저는, 비어져 있었습니다,"라는 말과 같이 비커'처럼 투명한 어떤 존재로 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저'라고 스스로를 지시하는 '나'는 자신의 발화에 있어 주어 혹은 주체만이 아니라 동시에 대상 혹은 객체의 자격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존재 위상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세계를 일인칭이라는 하나의 심급으로 조망하고 조직하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나'는 다만 부분의 자격에서, 즉 "정의할 수 없는 조각들"의 자격에서 시간의 흐름, 이 세계의 운행에 참여하게 된다.

  '정의할 수 없는'이란 그것을 "한 가지 무늬"로 제한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기도하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최세운의 시에서 "흘러내리는 조각들"은 "창문이 되기를, 바라고" 또 "땅에 떨어지기를 바라고"라는 어떤 임박한 상태에서 "한순간으로, 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표현된다. 즉 어떤 문턱에 이르러 그것을 넘음으로써 소진되는 데에서 스스로를 완결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 다시 다른 문턱을 향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연속된다. 이와 같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움직임에서 우리는 불가능성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존재 양상을 경험케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자기 자신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 있는 것들 혹은 그와 만나는 것들의 정서를 변용케 하며 함께 다른 무언가로 되어가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일이다. (시 p. 214/ 론 223-224)  

 

    -------------------------

  『현대시』 2023년 2월(398)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최세운/ 시인, 201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페티큐어』, 산문집『혼자였던 저녁과 저녁의 이름』

  * 김태선/ 문학평론가,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