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강에 나도 가서 잦아들 것을 외 1편
이향아
새벽 강에 나도 진작 잦아들 것을
누더기 신발로, 헝클어진 머리칼로
안 되면 풀더미에 아무렇게 쓰러져서
가시 돋친 풀이든지 엉겅퀴로 시들 것을
이승에는 징 소리 장구 소리 여전하고
참새들은 가뿐하게 날개 펼쳐 나는데
부질없는 원망으로 울어대던 부엉이
천치처럼 두 눈을 멀겋게 뜨고 있네
나 하나 없어져도 아무 탈이 없을 텐데
첩첩 사연 아뢰기도 부끄럽고 두려워라
동이 트는 안개 속에 두 팔을 쳐들고서
두드려도 소리 없는 흙구덩이 파고들까
가다가 멈춰 서고 가다 다시 멈춰 서서
더디 따라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전문(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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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도 나 살아가네
A: 사랑을 잃고도 나 이렇게 살아가네, 흐르는 눈물은 흐르게 두고, 눈을 뜨고 있는 나는 살아 있을까, 안녕한가 물으면 더듬거리네, 살았는지 몰라서 더듬거리네.
B: 세월이 흘러가면 절로 씻기지, 한 생애 사랑을 내것이라 여기는가. 알든지 모르든지 천금 같은 목숨. 사는 일은 견디는 일. 알면서 사는 사람 아무도 없네.
A: 하루를 살아내기 한 해보다 벅차. 남모르게 깊은 병 쇠잔한 숨소리. 가다 멈춘 여기는 어느 골짜기인가, 지금은 몇점인지, 기다려야 하는가 떠날 때가 아닌가.
B: 견디고 살아내니 장한 일 아닌가, 어디에 머물든지 무병 무탈하시게. 때도 곳도 눈 딱 감고 지나가시길. 총총한 저 별들도 등짐을 녹여내는 중일세.
-전문(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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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순례자의 편지』에서/ 2023. 3. 15. <이지출판> 펴냄
* 이향아/ 1963-1966년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 시집『캔버스에 세우는 나라』등 24권, 에세이집『새들이 숲으로 돌아오는 시간』등 18권, 문학이론 및 평론집『창작의 아름다움』등 8권, 영역시집『In A Seed』, 영한대조판『By The Riverside-저녁 강가에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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