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할아버지는 소년이었지만
모든 소년이 할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최백규
오래전 연락이 끊어진 사람의
청첩장을 읽으며
전신주에 종량제 봉투를
기대어 둔다
우편함에 쌓인
담배꽁초와 고지서
목욕탕 증기도
뒷산을 등지고
집에 작은 거미가 늘어나더니
장마가 오려나 보다.
손끝으로
누르면 바스러지는
매미가 운다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어쩌다
골목에서
먼 곳의
바람으로 서 있나
이대로 내가 대를 끊고
머물러도 좋은가
볕에서 그늘로 낮달이 흐르듯 살아
간다
- 『문학동네』(2022-여름, 전문)
▶시의 구두법과 시각적 여백에 관하여(발췌)_조강석/ 문학평론가
지면의 물리적 여백이 가장 먼저 눈에 뜬다. 모든 연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2행 1연으로 구성이 되었고 시의 후반부에만 3행 1연의 변주가 나오다가 종반부에 1행 1연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문장의 마지막 대목에 구두점은 없다. 2행 1연의 시행 구조는 연원이 깊다. 유종호 선생에 의하면 그 본격적 시초로 임화의 시편들을 꼽을 수 있고, 이후 청록파, 김수영, 신동엽 등 시적 경향과 무관하게 한국시의 고유한 시행 구조 중 하나로 자리 잡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리듬과 의미의 맥락에서 공히 단속과 흐름이 교차하는 2행 1연 구조는 우선 시각적으로 간명한 인상을 주고 소위 행걸침(enjambement)을 통해 리듬의 변주와 의미론적 모호성(ambiguity)을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기에 용이한 형태이다. 주기적으로 출현하는 지면 위의 여백이 시각적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시적 효과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최근에는 1행 1연으로 조금 더 극단적으로 변용되는 경우도 많아졌는데 이 역시 리듬과 의미 맥락뿐만 아니라 시각적 효과를 통해 시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다만, 이런 형식의 시행이 여백의 음성적 · 의미론적 · 시각적 여백을 취한다고 해서 모두 구두점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p. 시 274-275/ 론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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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2-가을(26)호 <quarterly review> 에서
* 조강석/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학평론가 등단, 저서『틀뢴의 기둥』『이미지 모티폴로지』『경험주의자의 시계』『아포리아의 별자리들』『한국시의 이미지 사유와 정동의 시학』『한국문학과 보편주의』『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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