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전해수_아비투스(habitus)와 '혼자'인 공간(발췌)/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 박춘석

검지 정숙자 2023. 2. 21. 02:39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박춘석

 

 

  발걸음 소리 촘촘하게 하늘을 울려 퍼지도록 불러 모았습니다 발걸음 소리는 광장 위에 가득하여 합창을 합니다 모일수록 더욱 웅장하여 노래 소리는 백 명 이백 명 천 명 아, 수를 헤아리는 일이 무의미한 나의 화음입니다 벽돌 한 개, 벽돌 두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우뚝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건축물이든 사람이든 꺼낸 만큼 나는 길 위로 옮겨져서 혼자서 듣는 노래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혼자서 보는 그림 같기도 합니다 아직 젊군요 아이들이 많이 컸지요 결혼을 일찍했습니다 나이는 얼마 안 됩니다 나는 키가 느리게 자라는 차별이 있습니다 비는 같은 날 평등하게 내려 전 세계의 산을 적시고 전 세계의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히 평등하게 덮여 있고 세계의 초목이 나란히 비를 맞았습니다 성질이 달라 키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큰 나무 작은 나무 중에 나는 작은 나무입니다 같은 구름 아래서 같은 비를 같은 날 맞고도 기근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일조량이 작은 나는 가을입니다 아니 가을꽃입니다 구름은 평등하고 비는 평등하고 나무는 독자적이고 나는 또 나대로 키가 작아 독자적입니다 그러므로 늦었지만 자라는 걸 멈출 줄 모릅니다 비는 여러 번 내렸고 나는 여러 번 차이를 겪었습니다 여러 번 보라색 꽃을 피웠습니다 일조량이 작은 탓이 아니라 독자적인 약간 어두운 보라색 꽃입니다 피었다 지는 반복 속에 어느 해 가을과 어느 해 가을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가을의 태도 보라색의 태도에 너무  진지해서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좀 여유가 없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각오한 삶이었습니다 보라색 꽃을 키우는 나무둥치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과 상관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 편 그것이 행복과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꽃 자체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 불어 흔들리는 나무가 춤추는 듯이 보입니다 행복 다음에 졸음이 오는 상황까지는 아닙니다 고통도 맛이라는 사실까지 왔습니다 꽃이 질 때 내가 소로로 잠이 든다면 그 무수한 걸음들의 한 잎 아름다운 낙하 그곳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만

     -전문-

 

  아비투스habitus와 '혼자'인 공간(발췌)_ 전해수/ 문학평론가

  박춘석의 시에서 '행복'이 등장한 것은 이번 신작시가 유일하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박춘석의 위 시에도 여전히 '혼자'라는 자기부정성이 존재하는데, 「행복해지고 있습니다」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를 내포하면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행복'에 대한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시인은 '집'으로 한정된 나 이외의 외부 세계를 '광장'으로 이끌어내면서 이곳(광장)에 모인 "무수한 걸음들"을 "혼자" 이외에 짙어지는 색깔(보라)로 채색해보려 한다. 미세하지만, 위 시 「행복해지고 있습니다」는 박춘석 시인의 시가 변하고 있는(변하고자 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위 시는 "혼자"를 "각오한 삶"에서 "행복"을 찾기까지 시인의 생활이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아직 젊"고 "결혼을 일찍 해서" "아이들이 많이 컸으며" "나이는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은 사실적이다. "행복"의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행복"해지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하늘"과 "구름"과 "초목"은 과연 나에게도 "평등"해진다. 계절의 변화마다 "나는 키가 느리게 자라는 차별"을 겪고 있었으며, 어느새 "고통도 맛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꽃이 질 때" 잠이 드는 법도 곧 체득되려니, "행복"은 혼자라는 상실감에서 도래한 외로움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출발하는 것이다. (p. 시 158-159/ 론 17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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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2023-1월(397)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 에서

  * 박춘석/ 2002년『시안』으로 등단, 시집『나는 누구십니까?』 『나는 광장으로 모였다』『장미의 은하』

  * 전해수/ 2005년『문학선』으로 등단, 저서『목어와 낙타』『비평의 시그널』『메타모포시스 시학』『푸자의 언어』, 현) 상명대 인문학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