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김지민
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셋이 함께 걸었습니다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운동장을 쪼개며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었나요?
팔과 팔을 엮으면 완성되는 그물
성글어 보이지만
그림자만은 커다란 바위 같았습니다
구령대 지나
축구 골대 지나
공 주위로 모여들고 퍼져 가는 남학생들 지나
볕과 그늘이 번갈아 우리를 품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셋이었습니다
나란히 걸으며 한 사람은 꼭 중심이 되고
둘은 변방이 되는 셋
둘과 둘과 둘만의 이야기를 모르는 셋
돌아가며 한 번씩
혼자 걷는 기분을 느끼는 셋
한 꼭지에 매달려
익어 가는 속도가 다른 포도알처럼
우리 중 누구는 먼저 달콤해지고
누구는 여전히 시큼했습니다
멀리서 공 하나가 날아왔을 때
우리는 보았습니다
작고 둥근 그림자를 피해
커다란 바위가 쩍 쪼개지는 것을,
거기서 한 사람이 툭 떨어져 나오는 것을요
나 집에 갈래
섭섭히 구르는 공과 함께
운동장은 불쑥 끝이 났습니다
-전문-
▶ 혼효의 기법(발췌)_ 정우신/ 시인
김지민 시인은 '운동장'을 '셋'이 걸을 때, '셋'이 아닌 경우의 걸을 때를 자연스럽게 겹쳐 놓는다. '셋'의 관계가 연결되면서 운동장은 '구령대나 축구 골대'의 고정적인 물질이 놓인 장소이면서 "섭섭히 구르는 공"이 굴러다니는 비현실적인 곳이 되기도 한다. 이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매개하는 한 시절이 구성된다. 이 '운동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엇일까. 화자는 힌트를 더 주지 않는다. 다만 장면과 장면을 겹쳐 놓고 기다린다. 한 시절의 감정이 모두 빠져나가고 얼룩으로 남을 때까지 다만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풍경의 속도가 김지민 시인의 내면 풍경으로 생각된다.
현실 세계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살아가게 된 것처럼 이제 '셋'은 한 시절, '운동장'을 걸으며 나눴던 이야기, 공기, 냄새로 전이된다. 누구도 잘못하거나 원하지 않았지만 '운동장'을 '시계 방향이나 반대 방향으로' 돌게 됨으로써 '셋'의 불화는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p. 시 32-34/ 론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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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2-여름(25)호 <issue 뉴 모나드> 에서
* 김지민/ 2020년 『현대문학』으로 시 부문 등단
* 정우신/ 2016년 『현대문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비금속 소년』『홍콩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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