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그리운 나의 하브루타(부분)/ 김영찬

검지 정숙자 2023. 2. 14. 03:14

<추모의 글>

 

    그리운 나의 하브루타(부분)

     - 잘 가! 나가르주나 성자 같은 이덕주 시인

 

    김영찬

 

 

  2018년 여름, 나는 가족들이 장기간 해외로 떠나 혼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외로움을 타는 내 곁에 언제나 그랬듯이 이덕주 시인이 있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뜨거운 폭양에 무작정 차를 몰고 달렸다. 목적도 목적지도 없는 여행. 돌아올 날짜나 그 어떤 일정, 숙박 등 일체 정한 것 하나 없이 가다가 길이 막히면 쉬고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뱃속을 달랬다. 그러다가 해 질 녘 어느 고즈넉한 소읍에 닿았는데, 거기가 바로 해미읍성이라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으나 언젠가 꼭 한번 같이 가보자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곳.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자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저무는 해미읍성. 도성 안은 바로 우리들의 헤테로토피아였다. 석양이 질 때까지 성곽을 돌면서 우리는 하브루타답게 눈빛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읍내의 예스러운 다방을 찾아 온갖 길목을 휘젓고 다니며 최백호의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우연히 닿아 걷고 또 걸었던 낯선 소도시의 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시 밤길에 차를 몰아 서해안 어딘가 바다 냄새 끈끈한 한 모텔 방에 꽂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문을 여니 넓은 모래사장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 같던 곳.

  거기 또한 우리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또 다른 토포필리아였으니! 해수욕 철이 지난 서해안의 모래밭이 넓게 펼쳐진 그곳의 아침은 정말 눈부셨다.

 

  안면도의 드르니 항구는 또 어떠했던가. 우리가 문득 그 작은 항구에 닿자 해안을 선회하던 갈매기 떼들은 이방인인 우리를 반겼다. 이름도 포근한 그곳 드르니 포구에서 우리를 향해 손 흔들어주던 주낙배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남도의 비자나무 숲길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처럼 우리 둘은 언제 어디로든 함께 떠돌아다닐 수 있는 최적의 동반자, 서로의 삶을 고양시키는 반려자伴侶者, 하브루타havruta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함께 나눈 행복한 순간들을 들춰내자면 끝이 없지만 해마다 시월상달이 오고 가을이 깊어가면 이덕주 시인과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우리 집 작은 뜰안의 감나무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를 대신하던 우리들의 감나무. 20여 년 전 뒤뜰에 심은 못생긴 감나무지만 까치와 직박구리 새들에게는 겨울 내내 단감을 식량으로 제공하는 나무. 이 나무를 심은 것은 나였지만, 이덕주 시인은 나보다도 더 이 감나무를 아끼고 사랑했다. 감나무 옆에는 웃자란 라일락이 한 그루, 키만 큰 모과나무도 한 그루 있었는데 이덕주 시인은 꽃모과가 열리는 모과나무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대여섯 개밖에 안 열리는 부실한 모과나무였지만 달걀처럼 매끈하고 예쁜 모과가 행여 바람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낙과를 뺨에 비비대며 모과에게 말을 걸곤 했다.

 

  심성이 어진 그는 가끔 혼잣말을 했다. 자기도 유실수를 가꿀 뜰 있는 집을 갖고 싶었다고. 나무와 꽃을 가꾸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지만 그는 투자를 잘못해서 대부분의 여유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꿈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형이 가꾸는 작은 뜰에서 덩달아 자신도 행복하다고.

  감나무 가지에 단감이 붉어지면 그는 기꺼이 달려와 단감을 함께 땄고, 한겨울엔 그 다음 해의 수확을 위해 곁가지치기 전지를 도왔다. 자기 소유가 아닌데 그렇게나 선한 마음으로 행복을 공유하던 사람. 이웃이 잘 되면 배탈이 난다는 속담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랑과 우정으로 기쁨을 함께하다가 훌쩍 떠나버린 이덕주 시인. 그는 살아있는 나가르주나 성자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곧잘 삼국지의 유비보다도 더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고 문우들에게 소개하곤 했다. (p. 159-162)

 

  시인 이덕주. 그대는 떠났고 곁에 없지만 내 가슴의 뜰에 유실수처럼 주렁주렁 살아 있다. (p. 163)

 

 

   나의 반려伴侶 이덕주를 기리며 쓴 추모의 시/ 이하 p. 163-164(終)

 

     높은 곳에 서면 보이는 것들 

 

      김영찬/ 시인

 

 

  어떤 시인은

  인간의 손이 닿지않는 곳에 드높이

  이마를 올려 놓고 죽는다

 

  이덕주  시인,

  그가 떠난 자리에

  아토포스Atopos 오색구름 멈춰 서 있다

 

  나의 반려伴侶 나의 하브루타havruta

 

  '그대는 그대의 벗인 나에게 맑은 공기였으며 때로는

  고독이며 빵이며

  그리고 또한 의약품이 아니었던가!' *

    -전문-

 

   * Mein Freund , Bist du Frische Luft, Einsamkeit, Brot und Medizin fur deinen Freund.

   니체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이 글을 절친 이덕주를 잃고 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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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주 유고시집 『나의 오늘』에서/ 2023. 1. 18. <시산맥사> 펴냄

  * 김영찬/ 2002년 『문학마당』에서 문단활동 재개, 시집『불멸을 힐끗 쳐다보다』『투투섬에 안 간 이유』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