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 강순

검지 정숙자 2023. 2. 14. 01:27

 

    크로노그래프Chrongraph

 

    강순

 

 

  밤은 그러니까 동사다

  깨다 일어나다 가다 보다 앉다 서다 눕다 울다 들이

  뭉치고 엉키는 자리에

  꿈틀대가 치대다 우물거리다 씹다 내뱉다 걷다 삼키다 들이

  해변 위 파도처럼 넘나든다

 

  운명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시간 장치 속에 들어가 있으면

  밤은 죽은 듯 활개 치는 동사다

 

  초침보다 더 빨리 어제 한 말을 후회하고

  오늘 못다 한 말을 반성할 때

  동사들이 쓸려오고 쓸려간다

 

  가만히 있어도 밤이 우리를 움직인다

  동사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합한 말

 

  숨을 내쉬면 네가 썰물처럼 쓸려가고

  숨을 들이쉬면 내가 너를 해변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밀려갔다 밀려왔다 밀었다 당겼다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지구와 달처럼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밤에 슬피 쓰고 있다

 

  쓴다, 라는 말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동사

  너의 발자국과 나의 속눈썹도 모두 쓴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

 

  우리는 파도의 심장을 달고

  시간 속에서 서로를 철썩이다가

  우리를 다 쓰기도 전에

  파고를 서둘러 떠나는 심해 잠수정 같아

 

  우리를 떠나 더 깊고 캄캄한 우리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밤의 동사들 그것이 우리인 거지

    -전문-

 

  해설> 한 문장: 기억은 존재보다 큰 것이다. 무엇보다 시인은 그러한 기억이 '밤' 혹은 '한밤'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넘쳐 온다고 말한다. 그의 시에서 '밤'은 시간이 움트고 움직이며, 마치 하나의 사역동사인 양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순간이다. 사람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간이 '우리'에게 틈입하여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버리는 현기증의 체험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식으로 불현듯 그리움이 찾아오는 밤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음미할 것은 그리움의 완미한 속도와 이율배반이다. 시인은 어떠한 속도로 그리워하는가. 숨을 내쉬고 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그리움이라면, 그는 '썰물'의 속도로 숨을 내쉬려 한다. 또한 당신을 해변에 심고 자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숨을 들이쉬려 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리움은 씨앗의 속도로 자라고, 썰물의 속도로 빠져나간다. 이 더딘 호흡법은 실은 가쁜 그리움을 피하려는 몸짓이다.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어  보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리움의 이율배반 또한 이 작품은 형상화한다. 당신을 해변에 심어 놓는 손짓을 주목해 보자. 그 손짓은 당신이라는 추억이 다시금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따라서 아이러니하게 읽히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음미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당신을 잊을 수 없다고 발음하는 혀끝과 떠나보낸다고 발음하는 혀끝 사이에서 어느 쪽이 견딜 만한 것일까. 그는 이 물음을 간직한 채 휘청거리고 있다. "지구와 달처럼" "인력과 원심력"처럼, '우리'의 추억과 현재 사이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슬피 쓰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떠올려야 할 것은 떠나보내려는 각오와 떠나보낼 수 없는 슬픔 사이에서 헤매는 자의 모습이다. 해변에 남는 것은 휘청거리는 발자국이고 슬픈 문장이다. (p. 시 19-21/ 론 163-164(박동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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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크로노그래프』에서/ 2023. 1. 1. <여우난골> 펴냄

  * 강순(본명, 강수원)/ 제주 출생, 199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즐거운 오렌지가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