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호우주의보/ 박수현

검지 정숙자 2022. 12. 28. 21:41

 

    호우주의보

 

    박수현

 

 

  오늘은 호우주의보가 내렸네요

  갑자기 불어난 물에 지하철역이 침수되고

  출근길, 바짓단을 걷어 올린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먼 곳엔 오백 년만의 가뭄에 농작물이 타들어 가는데

  지난주만 해도 계속된 폭염과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는데

  오늘 나는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수제비 반죽이나 치댈까 합니다

  해물 넣은 파전도 지글지글 부쳐내야겠네요

  나는 유연한 사람, 이상한 날씨에 금방 대처한다니까요

  아니, 맹렬한 태양이나 쏟아지는 작달비도 창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문명인이니까요

  TV엔 산호의 백화현상과 알프스 피졸레 빙하 장례식장 영상이 지나갑니다

  검은 중절모와 수트를 입은 사람들이

  산 중턱, 말라버린 바위에 붉고 노란 꽃송이를 던지는군요

  해변에 밀려온 고래 뱃속에서 나온

  플라스틱 컵, 슬리퍼, 일회용 라이터로 만든 고래 한 마리가

  불쑥 거실 안으로 들어와 유영하고 있습니다

 

  빨라진 지구 시계를 늦추기 위해

  황폐해진 지구의 습도를 맞추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잠시 에어컨 스위치나 끌 뿐입니다

    -전문(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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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창작』 2022-겨울(176)호 <2000년대 시인 신작시> 에서

  * 박수현/ 2003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샌드 페인팅』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