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서성이다
조숙향
1
여기, 겨울 아침 흔들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있다
물소리에 섞여 자갈은 굴러가고
강물에 발 담그로 우두커니 서 있는 잿빛 두루미도 있다
강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는 얼음빛줄기와
강가를 지키는 댓잎에 걸린 햇살이 시리다
2
여기, 어둠이 번져 얼룩진 유리창에 손을 대면
불 꺼진 거실에서 맴도는 정적이 숨 쉰다
눈 감으면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 초침이 보이고
실금 간 접시에 담긴 타버린 생선이
꺠진 믿음과 닫힌 마음 사이에서 일렁거린다
3
오래된 침식과 세월의 뼈, 또는 그 뼈와 강물의 파동 사이
나는 여기 머물고 또 흐른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지금, 여기. 시인이 마주한 세계는 구체적 현실을 전유하여 존재의 내면 풍경을 비춘다. 시적 주체가 감각하는 "흘러가는 물소리"와 그 주변의 존재들은 주체의 정동을 동요시킨다. 유수한 흐름 속에 겹겹이 채워진 존재의 선명함은 시적 주체의 심리적 정동과 정합하는 동시에 조용한 파문을 불러온다. 어떠한 사건도 일으키지 않는, 정적인 세계. "반짝이"거나 "시리"게 사유되는 존재는 "겨울 아침"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주체가 바라보는 저 아침의 풍경은 선명한 감각만큼이나 흐릿한 시계視界를 형상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무엇으로도 의미화되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금방이라도 휘발될 이미지를 구축하며 주체의 내면을 표상하는 듯하다. "어둠이 번져 얼룩진 유리창"에 의해 단절된 세계가 주조한 단조로운 이미지는 "불 꺼진 거실에서 맴도는 정적"만큼이나 불안정하다. 그런 이유로 저 바깥의 존재들은 상상적 공간에 붙잡혀 박제된 주체의 정서적 투사로 보는 것이 합당한지도 모른다. 상상적 층위에서 가공된 존재는 시적 주체와의 격절감을 부각하며 주체의 고립을 심화한다. "실금 간 접시"와 그 위에 "담긴 타버린 생선"처럼 언제든 무너지거나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팽팽하다. (p. 시 26-27/ 론 110-111) (이병국李秉國/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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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오늘의 지층』에서/ 2022. 11. 25. <푸른사상> 펴냄
* 조숙향趙淑香/ 강원 강릉 출생,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도둑고양이 되기』, 동인지『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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